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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세 Sep 07. 2024

Drowning man

Chap. 9 : 되겠다고 해서 다 되는 세상이 아니다, 닝겐

  여러 계획을 세웠다 엎으며 갈팡질팡하는 중에, 상황이 생겼다. 페이스북에서 팔로잉 중인 박범신 선생님이 링크를 올려놓았는데, 상명대학교에서 소설창작학과를 만든다는 공고였다. 입학지원자 중 등단 작가에게는 전학기 장학금을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2015년쯤의 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상명대학교는 서울 북쪽에 있었고, 수업은 주중에 2회는 있을 터였다. 오고 가고 밥 한 끼 먹으면 하루 8만 원씩 매주 16만 원이 깨졌다. 다른 여타 비용을 제외하고 오가고 먹는 비용만 매달 64만 원이 추가될 상황이었다.


  가족들은 대학원 진학의 필요를 인정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전액장학금을 받으면, 학기 내에 드는 비용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다는 아내의 대답이 이틀 만에 나왔다. 가족들은 계속된 창작보다는 일정한 자격을 갖춰 석박사를 한 뒤에 강의를 하길 바랐다. 강의노동자이자 공부노동자로 사는 것 또한 흥미로운 길이었지만, 내 관심은 창작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창작을 위한 나만의 작고 소중한 캐시 카우 또한 필요했다.


  돌이켜보면,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의 희생이 참으로 컸구나 싶다. 남은 생애 내내 갚아야 하리라.


  대전역까지는 차로 40분쯤 걸렸다. 케이티엑스가 없었으면 진학 자체를 안 했을 거다. 운전 피로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대전역에서 서울역까지는 딱 1시간이 걸렸다.

  서울역에서 내려서 아마 7013번 버스를 탔던 것 같다. 서울의 일부를 구불구불 지나 45분쯤 가면 상명대학교로 통하는 고갯길이 나오고, 버스 엔진의 회전수는 높아진다.


  면접은 박범신 선생님이 보셨고, 살아있는 작가를 직접 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 살아있는 작가이면서도 책을 많이 판 유명한 작가가 처음이라는 게 정확하겠다.


  당시 선생님은 영화 <은교>의 원작인 소설 『은교』의 작가로 유명했고, 논산시가 지은 멋들어진 작업실을 대여받아 거기에서 집필을 하시던 중이었다. 다른 작가들의 면접 중에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를, 대기실에서 들으며 되게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마련된 자리에 앉자, 박범신 선생님이 지원서류를 넘겨보시며 이것저것 물으셨다. 지원서류에는 지원자의 창작 소설이 두 편 포함되어야 했다. 스테이플러에 찍힌 종이가 접히지 않은 걸 보고는, 거기 실린 내 작품을 안 읽으셨다는 걸 알아차렸다.


  “평사리문학대상은 어디에서 주는 거야?”


  예상 질문 속에 그건 없었다. 나는 내가 제출한 작품을 어떻게 구상했는지, 주제가 뭔지, 어떤 식으로 창작을 해나가는지를 물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하동군에서 주최합니다.”

  “경남?”


  그 와중에 내 고개는 아래로 차차 처박혔는데, 나는 그걸 알면서도 고개를 제대로 들질 못했다.


  “상금은 얼마야?”

  “천만 원입니다.”

  “빈 집에 소 들어왔네.”


  그게 대화의 전부였다. 희곡상 수상이나, 창작에 임하는 마음가짐 따위는 대답할 일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어차피 지원자 모두를 받을 작정이셨던 것 같다. 나중에 들으니 상명대 소설창작학과는 등산용품업체 K-2 대표의 장학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원받기로 한 금액은 총 3억 원이었는데, 그걸로는 지원자들 모두에게 공지에 나온 대로의 전액 장학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난 이게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데, 10명도 안 되는 1기 지원자의 4학기 장학금을 3억 원으로 왜 못 주나 싶다. 학교는 그 3억 원이 1학기에 전부 고갈되었다고 말했고, 2학기부터는 장학금 혜택도 없애버렸다. 박범신 선생님이 끌어온 그 3억 원이 없었으면 만들어지지도 못했을 학과였구나, 학교가 학과 운영에 이다지도 관심이 없구나 싶었다.


  “돈이 충분하지 않아서, 이중세 너한테는 1학기 장학금밖에 줄 수가 없어.”


  안 물어보면, 후회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요?”

  “한국일보랑 세계문학상 받은 애들은 2년 전액인데…….”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잘린 뒷말을 알아들었다.


  밖으로 나왔는데, 바람이 아직 찼다. 주차장을 두어 바퀴 돌았는데, 눈물이 났다. 이것만큼 내가 받은 평사리문학대상의 지위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상황이 다시 있을까. 그렇구나. 난 평사리문학대상을 받으러 가면서도 이 문으로 문단에 진입하기 싫어했다. 수상하던 밤에 난 꽤나 얼굴을 찡그렸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쓰고 있는 도금된 자그마한 왕관을 내심 자랑스레 여겼던 것 같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와 세계문학상의 1/4의 지위가, 내가 탄 평사리문학대상의 무게였다.


  수업은 박범신 선생님과 황현산 선생님이 맡으셨다. 두 분 모두 1학기만 강의하셨지만, 문창과 수업의 전설로 불리는 분들의 수업을 받을 수 있어 영광이었다. 황현산 선생님은 집필을 마친 『삼키는 칼』을 읽고 평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 끝내 듣지 못했다. 학기가 끝날 즈음에 암 판정을 받으셨고 얼마 후에 돌아가신 걸로 안다. 잔잔하니 온화하고 글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은 분이셨다.


  박범신 선생님의 수업에 대해서는 전설이 많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체의 맛은 볼 수 있었다. 담배연기로 가득한 강의실과, 날이 좋다는 핑계로 주막에서 치러졌던 수업들. 박범신 선생님은 일종의 전복과 방향 전환을 통해 더 나은 견해를 얻어가길 바라셨던 것 같다. 수업보다는 논산의 작업실에서, 거기에서 치러진 행사를 마치고 둘러앉은 자리에서, 많이 배웠다. 선생님은 직접적인 논박보다는 일정한 태도와 방법을 보여주심으로 가르치는 분이셨다. 비록 「코의 무게」에 대해 혹평하셨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바탕에 깔린 애정과 따스함을 의심하진 않는다. 선생님이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학교를 다니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귀소본능이란 게 정말 있는지, 그렇게 과음을 하고도 대전역에서는 꼬박 내렸다. 집에 오면 거의 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젊어서 그런지 다음날이면 꼬박 작업실에 가서 글을 썼다. 대학원 과제가 많진 않았다. 그래도 다들 작가라서 창작의욕은 꽤나 자극되었다. 나는 그들을 이기고 싶었다. 찬탄만큼이나 강렬한 패배선언은 창작자에게 다시없다.


  한편으로 나보다 연배가 조금 높은 동기 작가들과도 교류했다. 그러면서 작가라는 존재들이 얼마나 개인적이고 폐쇄적이며 비타협적 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기질은 내게도 있고, 그런 기질로 인해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들은 일을 함께 하기엔 너그러운 사람들이 아니었고, 친근하거나 상냥한 이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두 번째 학기 끝무렵에 그들 중 한 분이 내게 말했다.


  “이 작가야, 너도 등단해야지.”


  아, 그렇구나. 그들에게 있어서 평사리문학대상이라는 건, 등단이 아닌 거로구나. 내가 바라보는 문단의 지형과, 문단 내부에 들어간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의 지위가 그 말 한마디에 다 담겨 있었다. 화가 나진 않았다. 그건 나름의 다정한 소견이었다. 놀랍도록 솔직해서, 돌아보게까지 만드는.


  학과를 대표하는 분이 박범신 선생님에서 은희경 선생님으로 바뀌었고, 학교 생활은 시들해져 갔다. 당시엔 작정했던 나만의 세 가지 일을 해내는 데만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다른 문학상에 도전하며 이력을 쌓고, 희곡을 더 쓰고, 장편소설을 완성하자는 계획은, 삐걱대는 중이었다. 나는 별 것 없는 닝겐이었고, 저 위에서 큰 눈으로 내려다보는 고양님은 이렇게 냐옹거리시는 것 같았다. 되겠다고 해서 다 되는 세상이라면, 넌 왜 여기 있는 거냐, 닝겐.


  하지만 천지 만물을 살피시는 고양님. 무척이나 성실하게 그 목표들에 도전해 왔답니다. 대학원 진학 전에 썼던 단편소설은 「그래서 그들은 강으로 갔다」를 비롯해 「코의 무게」, 「오래된 미래」, 「X」, 「쇼와 12년, 실화」, 「붉은 옷을 입은 여인」, 「머나먼 동방」, 「소설을 쓰다」, 「아르논 테오라의 우아한 오후」, 「어떤 아침」, 「환의 나라」, 「형제여 그대는 어디 있는가」 정도였다. 진학 뒤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인터, 뷰」, 「포이즌 아이비」 등을 새로 썼다. 2015년과 2016년 내내 그런 작품들을 쓰고, 주기마다 다시 고쳐 문학상에 응모했다.


  <끈> 다음 희곡은 곧장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연극제 본선 진출이 실패하던 밤, 공연 팀 모두가 회식을 했다. 그랬다. <끈>이 대한민국 연극제 대전 경연에서 탈락했던 그 밤이었다. 술을 꽤나 먹고 택시를 타고 돌아오니 밤 2시였다. 작업실 컴퓨터를 켜고 무언가를 잔뜩 썼다. 그걸 쓰지 않으면, 패배감에 며칠 절어 있을 것 같았다. 그걸 뼈대로 차차 작품을 만들어갔고, 열흘 후에 <모의> 초고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끈>의 실패는 팀의 실패였다. 그러나 내 희곡 <끈>에 대해서는 심사위원 모두 호평 일색이었다. 그런 칭찬이 큰 자양분이 되었다. 팀 전체의 패배 앞에서, 나는 다음엔 내 힘으로 내 팀을 이기게 만들고 싶었다. 그럴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 밤 동쪽 창문이 하얘질 때까지 키보드를 두들겼다.


  <끈>은 허공에서 우뚝 선 화강암이었다. 그게 어느 지점에서 어느 기회로 솟아올랐는지는 나조차도 모른다. 기말고사의 초조함 때문이었을까나. 돌이켜보매, 각각의 작품은 작가가 읽어오고 생각해 왔던 모든 것의 기이한 총합이다. <끈>이 내 안에 존재했던지를, 나는 <끈>을 쓰고 나서야 알았다.


  내 무의식은 <끈>과 반대되는 작품을 쓰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끈>은 언어 감각이 좋은, 매끄러운 작가주의적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난 매우 상업적인 도전을 하려 했다. 아주 감각적이고 세련되었으며 섹시한 작품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모의>였다. 그즈음에 함께 썼던 단편소설이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었고, 두 작품은 색깔이 상당히 비슷하다.


  <모의> 다음에는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려 했는데, 무거우면서도 주제 의식이 또렷한 작품을 쓰려했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감각은 화려하고도 세련되어야 했다. 나는 그 작품이 <끈>과 <모의>와 삼각형을 이룰 거라고 여겼다. 그게 <내 아버지의 집>이었다. <모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쓰는데, 각각 열흘과 여드레가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실력이 좋았다기보다, 얼른 써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리 쓰게 작용했었다.


  장편소설로 썼던 『삼키는 칼』의 원제는 『뿌리』였다. 아마 대학원 진학 직전, 2014년에 그 작업에 꽤 열을 냈던 걸로 기억한다.


  대전엔 침례신학대학이 있는데 거기 도서관을 갔다. 학교는 작고 오가는 사람은 적었지만, 장서는 꽤나 튼실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윗에 대한 자료는…… 토할 정도로 많았다.


  공부란 모름지기 어떤 자료를 쓸지 안 쓸지에 대한 결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살인사건 직후 탐정 최악의 악몽은, 넘쳐나는 단서들이다. 정보가 너무 많으면, 혼란이 더욱 극심해진다. 걸러낸다 해도, 이것 중에서 쓸모 있는 것들 정돈하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게 빤했다.


  그 빤한 짓을, 그냥 했다.


  전에 어디 말해두지 않았던가. 이 문학 씬에 남은 자들 대부분은 요령 없고 미욱해서 이리 글을 쓰는 거라고.


  내가 딱 그랬다.


  침신대 외의 다른 신학대를 가는 건 포기했다. 거기에 대단한 자료가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까지 이만큼의 시간을 들일 순 없었다. 읽을 논문과 책과 여타 다른 자료와 내부에 비치되어 있는 DVD 자료까지 알뜰하게 봤다. 아홉 달이 걸렸다. 잘못 쓴 게 아니다. 아홉 달이 맞다.


  자료를 보면서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갖가지 세부 설정들을 다듬었다. 매우 안심되고 좋았던 점은, 전체 이야기가 이미 결정되어 있고, 인물들도 충분하다는 점이다. 다윗과 밧세바와 압살롬과 요압과 아비아달의 행적이 성경과 자료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내가 할 일은 이들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일과, 소화한 자료들로 당대-기원전 1,000년 전인 철기 초기이다-를 어떻게 실감 있게 보이게 만드느냐일 것이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실력 발휘를 해야만 했다.


  쓰는 데는, 열한 달이 걸렸다. 목차를 전부 잡고, 각 쳅터마다의 인물들을 극적으로 세우고는, 그게 완성되자 쭉 써 내려갔다. A4지 336쪽이었고, 200자 원고지로는 2727매였는데, 매일의 목표량은 A4 1장이었다. 스티븐 킹처럼 7,000 단어인가를 목표로 삼다가 헤밍웨이처럼 내일의 주스가 나올 정도의 분량이 그 정도인 것 같아 종이 한 장으로 결정했다. 매일 썼다. 잘 될 때엔 더 썼지만, 안 될 때에도 한 장은 채우고 책상에서 벗어났다. 그러면서, 더 나아지려 오늘을 채우려는 스스로의 노력이야말로 예술가의 큰 미덕임을 배워나갔다.


  그 시절 많은 걸 배웠다. 가장 큰 배움은 문예창작은 누가 가르쳐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배워야 한다. 한글을 안다고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매끄러운 글쓰기, 설득력을 지닌 글쓰기, 매력을 지닌 글쓰기는, 배워야 한다. 하지만 문예창작으로서의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배우는 게 아니다. 가장 좋은 배우기는 존경하는 작가의 삶과 글쓰기에 임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보고 배우는 것이다. 그가 남긴 글을 깊이 읽고 오롯이 생각하고 자기 글에 자꾸 반영하며 내 글을 키우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하고픈 말은, 예술로서의 글을 잘 쓰는 건 오로지 나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애달파했고, 더 나은 글을 쓰고 있나 조바심쳤으며, 잘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안달복달했었다. 그건 더 나아지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다 괜찮았다.


  끝내 포기하지 않고, 그 모든 조바심과 애닳픔과 안달복달과 지랄발광을 글쓰기를 위한 내적 연마로 다 치환해 냈으니 말이다.


  내가 쓴 대로, 몇몇 부분들은 병이 되었고 아직도 나를 후유증에 시달리게 만들지만, 그것들이 나를 더 나아가게 만들었고 더 나은 지점으로 진화하게 도왔다.

  뭐, 이런 말은 어디 워먼 부커상이라도 받은 작가라야 적절한 발언이겠지만, 나는 내가 지녔던 당초의 수준에서의 발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는 형편없는 글을 쓰는 애송이였고, 그걸 꽤나 나이 들어서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으며, 그러면서도 글을 쓰는 작가의 길을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했다. 그런 나는 『삼키는 칼』을 쓰는 과정을 통해 꾸물꾸물 나아갔고, 그러면서 작가란 그저 오늘의 페이지를 채우는 여정을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두 번의 등단이 나를 그런 지경으로까지 데리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내 속은 복작거리고 있었고, 정신적이자 육체적으로 부정적이었던 신호들은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삼키는 칼』을 쓰는 와중에는 괜찮았다. 차차로 나는 매일의 글쓰기를 해나가며, 그 안에서 나름으로 자족하지만 더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그러나 글쓰기를 떠나면 그걸 잊는 삶을 훈련하고 있었다.


  그렇게 2015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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