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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세 Aug 29. 2024

Drowning man

Chap. 5 : 허들, 혹은 과녁

  문학상을 받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전화로 통보될까, 문자로 알려질까. 아니면 메일로 건조하게 발송될까. 내겐 그런 세세한 사실-그렇기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디테일들-을 알려줄 선배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기이한 궁금증이 들었다. 당선되면, 어떤 기분일까.

  문학상이 무엇이고, 등단이란 뭘 가리키는가에 대해선 출간된 좋은 책들이 있다. 오래되었지만 강준만과 권성우가 공저한 『문학권력』이 추천할 만하고, 장강명의 탁월한 르포 『당선, 합격, 계급』이 등단과 공모전에 대해 상세히 다루었다.

  중요한 건, 이게 실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일 터이다. 장강명이 날카롭게 꿰었듯이, 한국의 등단제도는 과거시험 혹은 공무원시험 제도와 똑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글재주를 지닌 똑똑한 이들은 글재주만 지닌 미욱한 이들에 비해, 이 시장의 폐해를 재빨리 깨닫고 발을 뺀다는 점이다. 똑똑한 이들은, 글이 더 돈이 되는 자리로 진작에 갔다. 그렇기에, 지금 글쓰기 시장에 남은 자들은 미련하고 우둔한 자들이다.

  나중에 쓸 내용이지만, 글만 써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그런 특별한 몇몇이 되기 전에, 우린 문학상을 획득해 등단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해야만 한다.

  결국 목표는 단순하다. 내가 쓴 글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거다. 그러려면, 내 글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매체가 가장 좋은 매체일 것이다. 글이 실릴 곳은 매년 1월 1일 신춘문예를 진행하는 일간지들, 문예지라 불리는 문학예술잡지들, 인터넷 매체 등이다.

  80년대까지는 신춘문예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자기 작품과 심사평이 전국에 배포되는 신문에 실렸다. 거기에, 일정 정도의 인지도를 쌓으면 소설을 신문에 연재할 수도 있었다. 책을 내기까지, 가장 순탄한 경로였다.

  90년대 들어서며 문예지가, 거액의 상금을 내건 문예지의 장편소설공모전과 신인문학상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문예지의 가장 큰 장점은 내 글을 싣고 평을 받을 수준 높은 공간이라는 데에 있다. 문단 엘리트들의 인정을 받는다는 성과 또한.

  책을 빌려주는 대본소들이 우후죽순 생기던 2000년대 초반, 질보다는 양이 우선이었다. 양이 많은 책들이 순환이 좋았다. 그러자 인터넷 매체들에 실린 소설들이 제대로 된 검증 없이 책이 되었고, 질이 낮아진 악화들이 괜찮은 소설들인 양화를 구축하자, 독자들은 떠나가고 말았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웹소설을 통해 반복된다. 나는 웹소설 시장의 생산이, 소비자가 소설을 읽어치우는 정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양이 나오는 속도는, 질을 담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정도로만 언급하겠다. 더 얘기를 할 정도로 웹소설의 영역을 잘 알진 못한다.

  이런 정도의 매체 변화의 흐름을 살면서 겪어왔다는 정도만 짚어두려는 것이다.

  내가 문학상 수상을 노릴 즈음인 2010년 전후에는 문예지의 장편소설공모전과 신인문학상이 각광받았다. 이후 신춘문예의 위상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거기 응모하는 사람들은 많다.

  신춘문예 위상이 내려간 데에는 신문이라는 매체 자체의 추락과 궤를 같이 한다. 인터넷 매체를 통한 연재는 책으로 나오기 어려웠다. 인터넷 매체와 출판계의 연결은 여의치 않았고, 당시엔 인터넷에서 연재하는 데에 원고료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니 출판을 원하는 나로서는 아무 대가 없이 작품을 노출시켜야 했다. 신춘문예나 신인문학상 모두 인터넷에 노출되었던 작품은 심사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당시 내 가시적인 목표는 책을 내는 작가가 되는 거였고, 그러려면 신춘문예나 신인문학상을 뚫어야 했다.

  가진 원고가 단편소설뿐이었기에, 책을 내려면 이걸 묶는 수밖에 없었다. 묶이려면 인지도를 높여야 했고, 거기엔 문학상 수상 밖엔 다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난 문학상 수상에 목을 매게 되었다.

  지금 정도의 안목을 당시에 지녔더라면, 그렇게 간절하게 그것만 뚫으려 하진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다른 루트는 더 많은 시간을 요구했고, 나는 그걸 지불할 여유가 없었다. 2010년 즈음에는 장편소설을 구상하기도 벅찼다. 나는 단편소설을 정복하려고 애쓰는 중이었고, 익숙한 방식을 통해 다른 작법들로 글쓰기 영토를 확장하는 중이었다. 조금 여유가 생기고 뭔가 넓게 쓸 수 있을 것 같았을 땐 재학기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지니고 있는 무기로 당시를 돌파해야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 과거응모자의 계속된 낙방과 똑같았다. 봄과 가을에 한두 개씩 자리한 문예공모전에 내고, 12월 초에 내는 신춘문예까지를 목표로 여겼었다.

  문창과 내에 일종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공모전 투고 요령 같은 건 대전대 내엔 없었다. 진지하게 등단을 준비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들도 한두 해 지나서는 점점 취업으로 방향을 잡아나갔다. 죽어라고 쓴 글을 성의껏 평해줄 사람은 교수님 두어 분뿐이었다. 나중엔 괴로움을 드리는 것 같아 점차 드문드문 가다가 결국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문예지의 신인문학상과 신춘문예는 내게, 책을 내고 작가로서 활동하기 위한 자격증 획득에 가까웠다. 그걸 이루지 못하면, 차를 몰고 도로에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누군가가 으름장을 놓는 것 같았다. 이러한 관문이 한국에만 존재하는, 작가를 꿈꾸는 문학도들을 판에 박힌 공모전용 작품만 쓰게 만든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안다. 자비출판이나 출판사 투고라는 방식을 권유받기도 했다. 기가 막히게 바이올린 연주를 잘하는 내가 내 돈으로 세종문화회관을 빌려 2시간짜리 독주회를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건, 나라는 사람의 브랜드 가치이다. 그 가치는 제도권의 인정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그렇게들 동유럽이나 독일로 유학을 가는 것이리라. 그리곤 콩쿠르에 입상해야겠지. 자비출판이란, 인지도를 얻지 못한 연주자가 스스로 만든 무대와 다름없다.

  출판사 투고라는 방안에 대해서는, 문학동네 전 대표 강대형의 말이 옳다. 사람들은 공모전의 공정성은 의심하지만, 투고를 읽는 편집자의 눈은 공정할 거라고 근거 없이 믿는다.

  나중에 장편소설을 여러 곳에 응모한 뒤에야 알았다. 거절 이메일을 받는 것조차 드문 일이라는 걸. 원고를 어떻게 읽었는지, 방향성에 대한 조언들은, 전혀 없었다. 출판사 편집자들이 투고 원고를 꼼꼼히 볼 만큼 업무환경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사실은, 아주 오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매일 16시간씩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쓴 글을 고치고, 고친 걸 뽑아 다시 끼적거리고, 새로운 걸 구상한답시고 이면지에 뭔가를 쓱쓱 써댔다. 힐러리 맨틀이 『울프 홀』에서 추기경을 묘사하며 말했던, 앉아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공평한 대가로 주어진다는 불룩한 배는 그때 자리를 잡았다. 정신적 압박으로 인한 호흡 곤란과 강박증도 그즈음에 얻었다.

  문학상 공략을 위해 나중엔 별짓을 다하기도 했다. 첫 문장을 고심하고, 글씨 크기를 10.5로 했다가 11로 바꿨다가, 글씨체를 바탕에서 굴림으로 바꾸고, 전체 여백을 포함해 자간을 조정하면서, 어떻게든 심사위원의 눈에 드는 꼴을 갖추려고 안달복달을 했다.

  하지만 간절히 기다리던 당선 전화는 끝내 오지 않았다.

  다른 신춘문예 주관사들은 응모편수를 비공개했기에 한국일보만 살펴보자면, 2024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참가한 신청자들은 631명이었다. 작품수는 그것보다 많았을 거다. 최소 631편 중에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4개였으니, 예심 경쟁률은 157:1이었다.

  문장웹진에 실린 김정빈 평론가의 「문학상 : 비평기구」라는 글에 따르면, 2021년까지의 10년간 문학동네와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응모편수 평균은 667과 477이었다.

  그중에서 ‘1’이 되어야 했다.

  그건 과녁 맞추기였다. 어느 정도의 기준이 되는 허들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맞춰야 했고, 내가 온마음을 다해 썼던 작품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은 셈이었다. 일정 기준만 넘으면 당선이 되는 과정이었으면, 내 작품이 선택받을 수 있었을까. 나는 2012년부터 투고해 온 모든 원고의 결과를 기록한 한글 파일을 가지고 있다. 매년 20회 이상의 투고 모두 낙선을 하고 말았다. 매번 낙선했고, 나중엔 덤덤하게 반응하기도 했지만, 그 매번 모두 격렬하게 아팠다. 그러자 내 작품은 허들조차 못 넘는 수준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의심을 뒤따라온 자기 비하가 호흡 곤란과 강박증과 함께 나를 공격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끝없이 가라앉는 기분이 떠오른다. 나는 어떤 보석도 품지 못한 무가치한 돌멩이였고, 빛도 없는 심해 깊이 빠지고만 있는 것 같았다. 그 괴로움 속에서, 다른 수는 없었다. 쓰고 쓸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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