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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세 Aug 27. 2024

Drowning man

Chap. 4 :  저 이는 미친 사람입니다

  내가 문창앓이라고 이름 붙인 현상을 겪는 분들이 있다.

  문창과에 가지 않아서, 글이 늘지 않아. 문창과를 다녔으면, 이런 슬럼프에 시달리지 않을 텐데. 문창과를 안 다녀서 글을 제대로 쓰는 법을 몰라.

  문창과만이 줄 수 있는 뭔가가 있긴 하다. 이번 챕터에서 그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앓는 그들이 믿는 그걸 해결해 주는 건, 문창과가 아닌 다른 존재다.     

  문창과를 다니면 알게 되는 몇 가지 중 하나는, 창의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창의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그걸 자신이 왜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수가 많다.

  그걸 알더라도, 남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할 재주가, 대부분 없다.

  재주가 있더라도, 다른 이가 창의력을 발휘하게끔 제대로 짚어주고 북돋아 주지 못한다.

  가장 좋은 창의력 계발 수업은, 자신이 어떻게 창의력을 발휘해 작품을 착안했고, 여기에 어떤 영감들이 어떤 작용을 했고, 그걸 만들기 위한 자신만의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문창과엔 그런 게 없다.

  아니, 내가 다니던 시절의 대전대학교에는 그런 과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비단 대전대만의 문제는 아닌지, 내게 극작을 배우는 한예종 학생이나, 여러 예대 학생들을 봐도 그런 가르침은 드문 것 같다.

  절반 이상은 학생들의 문제였다. 문예창작에 대한 학생들의 열망은 저마다 각각이었고, 대부분은 평균 이하의 창피한 수준이었다. 그들을 이해한다. 나 또한 수능 점수에 맞춰 생명과학을 전공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했던 시간낭비들을 그들이 하는 건 보기 괴로웠다. 가까운 몇몇에게 전과나 자퇴를 권했지만 그들은 학업을 이어갔고,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는 사회인이 되었다. 굳이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며 그들은 종종 대학에서 배운 게 없다고 푸념했다.

  나를 환대했던 이진우 교수님은 입학하던 해에 퇴임했다. 그 뒤로 학교는 소설 부문 교수를 세우지 않았다. 평론을 하던 정순진 교수께서 애써주셨지만, 빈자리는 컸다. 커리큘럼에 있던 소설 관련 수업을 죄다 들으며 깨달았다. 여긴 쓰는 법을 알려주는 곳이 아니로구나.

  쓰는 법은 스스로 배워나가야 했다.

  한편으로 문창과를 다니는 이점들도 차차 알게 되었다. 입학한 2009년도 1학기 문장연습 시간에 정순진 교수는 이상의 「날개」를 패러디한 소설을 다음 주까지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어떻게 쓰지, 마음이 급했다. 우선은 「날개」를 알아야 했다. 고등학교 문학 책에 수록된 부분이 아닌, 전문을 읽은 건 처음이었다. 「날개」를 읽자, 이 글을 쓴 사람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을 알아야, 이 글이 어떤 경로로 창작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고, 그 뒤에야 「날개」를 제대로 패러디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권영민 교수님의 『이상 전집』과 『이상 텍스트 연구』를 붙들었다. 그리고 이상의 소설을 전부 읽었다. 이상의 작품을 그리 성기게 뜯어본 뒤에야 뭐를 쓸지 겨우 가늠이 되었다.

  그렇게 쓴 내 첫 소설이 「쇼와 12년, 실화」다. 메일로 제출했고, 다음 주 수업 때 정순진 교수는 학생 수만큼 작품을 인쇄해 오셨다. 그리고는 읽으라며 30분을 주었다. 거기엔 「쇼와 12년, 실화」가 인쇄되어 있었다. 소름 돋는 30분이 지난 뒤, 정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이 쓴 소설과 다르죠?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감이 와요?”

  전에 없는 칭찬에 며칠 동안 감격했다.

  감격과 별개로 「쇼와 12년, 실화」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평을 들으러 정 교수님께 찾아가 아주 상세한 평을 들었다. 나는 그걸 기회 삼아 이후 쓰는 소설들의 평을 들으러 정 교수님의 방에 무수히 오갔다. 교수님들은 학생의 글을 읽고 세세히 평을 해줘야 하는 의무를 지녔다. 나는 그걸 활용했고, 굉장히 아픈 지점을 여러 번 지적당한 좋은 기억이 있다.

  문창과를 다니면서 얻는 다른 이득은, 내부 경쟁이다. 학생 대부분의 창작력과 집필의욕은 바닥이었지만, 그중 몇몇은 꽤나 경쟁적이었다. 나는 그들의 작품을 아득히 뛰어넘는 작품을 써내어 감탄과 납득을 얻어내고 싶었다. 예술적 자존심이 강한 그들에게서 그걸 얻어내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경쟁심이 꽤 오래도록 나를 불붙게 만들었었다.

  마지막 이득은 마감시간이었다. 보통의 문창과 수업은 기말고사를 작품 제출로 대체했다. 다른 학생들이 12월 5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글을 11월 20일 즈음 시작하면, 나는 개강하는 날부터 글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매번 그걸 쓰고 고쳤다.

  이 과정에서 난 내 인생의 은인을 만났다.

  장중한 만연체의 문장 때문에, 내 별명은 한때 대전대 이문열이었다. 반면 이문열 작가가 지니지 않은 단점들도 더덕더덕 붙었었다. 문장은 길고 지루했고 이야기 진행은 느렸다. 가장 나빴던 건 제대로 된 문장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문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었다.

  그걸 짚어준 분이 박지영(가명) 교수였다. 소설창작연구라는 수업을 맡은 강사였던 그분은 내가 중간고사 대체로 제출한 「가짜」를 대상으로 3시간을 수업한 뒤, 물으셨다.

  “이중세 씨. 수업시간은 끝났지만 내가 말할 게 남았는데, 좀 더 들을래요?”

  나를 비롯해서, 당시 소설에 열심이었던 네댓 명이 남았다. 그리고 박지영 교수는 나를 옆에 앉혀두고 1시간 동안…… 문장을 설명했다. 주어와 술어, 조사의 활용, 문장의 적절한 길이, 형용사와 부사를 어느 위치에 넣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차이, 문장들과 문단들의 관계, 문단이 만드는 전체 글의 속도와 무게 등을 설명하는데, 인쇄된 「가짜」의 첫 페이지가 시뻘겋게 젖어버렸다. 그 귀한 페이지가 없어진 건, 내가 이후 한 달 동안 그 페이지를 들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깨인 시간 내내 그걸 들고는 너덜너덜해 찢어질 때까지 문장을 짓는 법을 고민했다. 시제의 문제, 은는이가의 차이점과 적절한 사용법, 짧은 문장과 긴 문장과 펀치라인의 활용 등이 내 머릿속에서 뱅뱅 맴돌았다.

  그 1시간에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사람이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가장 지극한 정성을 체감했다. 어떤 선생님도 내게 이렇게 해주진 못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짚어주며 모든 문제들을 속속들이 짚어주는 사람은 그분이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다. 내 생애 전체에서 가장 축복받은 1시간이었다.

  그즈음 확립한 문장에 대한 개념은 이후 작품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우선은 문장 길이는 짧은 게 낫다. 수련이 부족한 자에게 너무 많은 재료는 부담이 된다. 이후 나는 한글 10p 크기에서 한 줄을 넘지 않는 문장을, 단문으로 쓰려고 애썼다. 나는 두 줄이 넘어가는 복문을 쓰는 사람이었고, 그러니 문장이 매끄러울 리 만무했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원고지에 필사했고, 문장은 감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가락은 물론이고 손바닥에까지 굳은살이 박였다. 이기호의 「수인」과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도 원고지에 연필로 필사했다.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 보르헤스의 여러 단편들은 컴퓨터로 옮겨 적었다. 문장의 감각을 익히는데, 그 시간들이 긴요하게 쓰였다.

  문단은 뚱뚱해선 안 된다. 소설을 쓴 뒤에, 그걸 인쇄해서 A4 지를 팔길이 너비에서 보는 훈련을 했다. 글자와 여백의 비율은 다른 거장들-죽은 혹은 죽지 않은-에게서 배웠다. 거장들의 작품을 키보드로 옮기고, 그걸 A4지로 인쇄해 보는 훈련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문장을 만들고, 문장 사이에 긴장 혹은 여유를 제공하고, 문장들로 문단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가 한눈에 보였다.

  그런 과정 중에서, 내가 쓰고 싶어 하는 경향의 글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를 경악하게 만들고, 오랫동안 빠져들게 만든 작가는 코맥 매카시였다. 그의 글을 읽으며 2009년 여름에 썼던 작품들이 「그래서 그들은 강으로 갔다」와 「코의 무게」였다. 차츰 나만의 문체를 익히게 되면서 코맥 매카시에 대한 동경과 찬탄은 사그라들었지만, 그의 흔적은 여전히 내 문장 안에 자리하고 있고, 지금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그의 책을 사모으는 게 내 취미 중 하나다.

  문장 고민과 습작 쓰기를 계속하면서, 학내 활동도 부지런히 했다. 대전대학교 도서관은 당시 북클럽을 만들면서 각 클럽의 학생들에게 1인당 20만 원의 도서구입비까지 지원해 주었다. 북클럽을 포함해 소설창작 스터디도 만들어 돌렸다. 멤버는 늘 같았다. 김희승과 정혜성과 내가 주축이었고, 다른 이들이 들어왔다가 나가길 반복했다. 학교는 총 4년을 다녔다. 편입했기에 2년이면 졸업이 가능했지만, 중간에 휴학을 2년 해서 4년을 채웠다. 휴학기간에도 소설 수업을 청강했고, 교수님들 방을 드나들면서 썼던 소설을 평 받았다. 막판 1년 동안은 등단하겠다며 2001년 문예지와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구해들였다. 한 해 당 10여 편 정도 되었는데, 그걸 스터디 1회에 두 작품씩 분석했다.

  당시에 나는 다른 학생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희보다 11살은 더 먹은 사람이 매일 스터디한다고 불러대고, 도서관이나 빈 강의실에서 그 큰 덩치를 구부러 가며 뭘 쓰고 고치고 앉았고, 휴학했다면서 소설 수업은 청강하는 도드라지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했다. 저 이는 미친 사람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에게 그리 얘기했고, 나는 그 얘기가 기뻤다. 정민 선생이 쓴 대로,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고 믿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미친다고 세상 모든 일이 다 바란대로 풀리는 건 아니었다.

  등단은 입학 이후 내내 계속된 과제였다.

  그즈음 신춘문예 당선은 문예지 입상에 비해 메리트가 떨어진다고 여겨졌었다. 70년대에는 신문연재야말로 자기 글을 세상에 드러낼 최고의 아웃핏이었고, 1년에 한 번 당선된 소설이 일간지에 전문 실린다는 사실도 큰 영광이었다. 하지만 연재할 매체와 방식이 다양해지고, 신문의 매체 영향력이 줄어든 지금, 신춘문예는 예전 같지 않다. 신춘문예로 한정하면 조선, 중앙, 동아, 한국이 금메달이었고, 경인, 서울, 문화 정도가 은메달이었으며, 다른 신춘문예가 그 아래로 여겨졌다. 문예지는 창비와 문학동네가 첫 손이었고, 자음과 모음을 비롯해 현대문학과 문학과 지성사의 문예지들이 그다음이었다.

  문예지들은 자신들이 뽑은 신인작가에게 등단작과 다음 작품 정도를 실어주었고, 작가들은 해당 출판사를 통해 단편집이나 장편소설을 출간할 기회를 모색했다. 신문보다는 여기가 문단과의 접촉면이 많을 것 같았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 동안, 미친 듯이 소설을 써 내려갔다. 총 15편을 썼는데, 「그래서 그들은 강으로 갔다」, 「코의 무게」, 「오래된 미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붉은 옷을 입은 여인」, 「X」, 「쇼와 12년, 실화」는 이후 문학상을 받거나, 문예지에 실렸다. 나는 아직도 간간이 「인터, 뷰」, 「머나먼 동방」, 「소설을 쓰다」, 「아르논 테오라의 우아한 오후」, 「어떤 아침」, 「포이즌 아이비」, 「환의 나라」, 「형제여 그대는 어디 있는가」를 인쇄해 다듬는다. 그러다 보면 괴롭게 문장을 노려보며 보냈던 대전대에서의 생활이 다시금 떠오르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내 얼굴은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아련한 기쁨이, 막막함에 일깨워진 다급함이, 뒤쳐질까 펄쩍이며 들었던 조바심이, 글 속에서 안온하며 평안함을 느꼈던 찰나의 기억이, 소설 안에서 차차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을 노리기엔 당시 내 호흡이 짧았고, 단편소설로 등단도 못한 자가 무슨 장편을 노린단 말인가 싶어 미리 그만두었었다.

  한편으론 졸업학기에 학점이 모자라 애를 먹었다. 소설을 듣는 것만으로는 점수가 충분치 못했던 것이었다. 한 번도 듣지 않았던 극작 수업을 들어야 했다. 정근혁(가명) 교수님의 희곡 창작의 실재는 기말고사를 희곡으로 받았다.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장르여서 9월 첫날에 통보받은 이후 내내 골머리를 싸맸다. 10월 중순부터 뭔가 바탕을 잡아나가 11월 중순에 간신히 끝을 냈다. 12월에 들은 정근혁 교수님의 평은 나쁘지 않았다. 당시에 내가 훈련했던 건, 어떤 글을 쓰는 데 있어, 어떤 준비와 대비를 하느냐였었다. 희곡을 쓰면서 막막하던 내내, 나는 무대를 굉장히 깊이 고민했었다. 무대 구성을 마치자, 작품은 빠르게 쓰였다.

  학교 가기 전에 태어났던 아들은 걸음을 잘 걸었고, 졸업식장에서 아장거려서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2013년 2월의 일이었다. 수석졸업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아직 미등단자였고, 당시의 나에게는 그건 운전면허증 없이 고속도로로 나가야 한다는 의미로 여겨졌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문학상에 응모는 계속했었다. 12월 3일이면 각각의 신춘문예에 응모를 했고, 매번 일정하게 돌아오는 신인문학상에 인적사항을 적어 다듬은 원고와 함께 보냈다. 그즈음 나는 매년 20회 이상 응모를 했고, 전부 떨어졌다.

  등단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내 정신을 가닥가닥 옭아매고 있었다. 아이를 보고 졸업식장의 사람들이 웃었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나는 글쓰기라는 병을 앓으면서 문예창작과를 다녔고 이제 막 졸업했지만, 여전히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계속 단편을 써야 하나? 내가 써둔 몇 편의 단편 무엇도 아직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이 글들을 계속 다듬어서 성과를 낼까? 장편소설이나 다른 장르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새로 다른 단편소설을 쓸까. 한 사모님께 전화를 해 대필작가 자리가 있는지 살펴달라 부탁할까.

  산더미처럼 쌓인 원고로 돌진해서 한 점 한 점 들춰보며 다시 퇴고를 해야 할까.

  그 겨울 내내 난 몹시 심란했고, 공무원 수험생 시절보다 상황은 훨씬 안 좋았다. 4년을 더 늙은 나는, 글로 승부를 내는 것 이외엔 다른 수가 아예 없었다.

  그 생각이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위에서 나는, 문창앓이를 하는 분들을 해결해 주는 게 문창과가 아닌 다른 존재라고 언급했다. 그게 누구냐고?

  당신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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