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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세 Aug 23. 2024

Drowning man

Chap. 3 :  모퉁이를 만나다

  그 쓰고픈 글을 쓰기까지는, 꽤나 많은 과정을 지나와야 했다.     

  포기는 내 동생이 빨랐다. 공무원 관련 서적들을 다 태워버린 그 애는 인천 어느 기업의 사장 비서로 취업했다. 대전에 남은 나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글쓰기를 떠올리며 열정을 불태웠다고 썼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즈음은 멍하게 보냈다. 책상에 앉아 그날 분량의 공부를 대강 때우곤 나머지 시간을 간신히 견뎠다. 더 공부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놓아버리지도 못하던 그 시기에 나는 서른 살을 맞았다.

  1점 차이로 떨어진 국가직 시험이 치명타였다. 마킹 직전까지 답이 2번인지 3번인지를 고민했다가 겨우 냈는데, 내가 몇 번으로 마킹했는지를 끝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게 맞았더라도 다른 문제가 틀려서 떨어진 거였겠지만, 이후 종종 그 마킹하던 순간이 꿈에 어른거렸다. 그 꿈은 내가 글을 쓰면서부터 희미해졌다.

  그 무렵엔 닻도 돛도 없었다. 파도에 따라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영영토록 헤매는 기분이었다. 조 목사 부부와 연락이 끊긴 지도 반년이 넘었고, 주변에 연락을 하는 사람도 전부 토막 나 있었다.

  동생의 이삿짐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동생의 이사를 거들어주길 바라셨다. 번잡스러운 게 싫어 가지 않으려 했으나, 이사하기 전날에 돕기로 결정했다.

  이삿짐은 우리 집 일을 곧잘 거들어주시던 백 씨 아저씨의 트럭으로 옮겼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자마자 잠에 빠진 것 같다. 

  깨고 보니, 어느 빌라 건물 주차장이었다. 어느 여자분께서 아들이랑 배드민턴을 치다가 우리 트럭이 다가오자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조수아(가명) 사모였다.

  “생전 안 치던 배드민턴을 이상하게 치고 싶더라니!”

  기이한 일이었다. 조혁진 목사의 가정교회가 빌라 건물 5층이었고, 내 동생의 새 집이 그 건물 반지하 방이었다. 목사님 댁이 그리 이사 온 건 열흘 전이었다. 만일 내가 안 갔으면, 어머니와 동생은 나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조수아 사모를 모르고 이사했을 것이다. 옮길 교회를 찾아야 했던 내 동생은 문제를 해결했고, 끊어졌던 인연은 이어지게 되었다.

  사흘 뒤에 전화가 왔다. 나는 그제야 조수아 사모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알게 되었다.

  기독교서적 중에는 자서전 양식으로 쓰인 에세이가 많다. 그중 꽤 많은 분량이 대필작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수아 사모는 그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분이셨다. 당시 그분은 과도한 업무에 눌린 상황이었고, 방법을 찾다가 나를 떠올린 것이었다.

  인터뷰를 하고, 그걸 정리해서 일정한 분량으로 써서 묶는 작업을 하면, 전체 원고료 중 절반을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300만원이었다.

  시험 공고는 다음 해에야 날 예정이었고, 나는 색다른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자서전 주인공은 인천OO교회 문수한(가명) 목사였다. 간암 4기 진단을 받고 복수가 부풀 정도로 위중한 상황에서 기도로 완치를 겪은 분이셨고, 30년 목회를 통해 성도 10만 명의 교회로 부흥시킨 분이었다. 자서전을 쓰면서 정작 문 목사님은 못 만났고, 여러 자료와 장로들의 얘기를 취합해 글을 써야 했다. 자서전을 쓰는 분은 너무 바빠서 자기 자서전을 쓰는 작자-아직 작가가 아니기에-를 만날 시간도 제공 못할 지경이었다.

  1권 분량의 에세이였으니, A4지 60장 분량이었을 건데, 열흘 만에 쓴 것 같다. 송부한 원고는 지금 내게 없는데, 아마 조 사모께서 구멍 난 문장들을 손보느라고 고생을 적잖이 하셨을 거다.

  그게 내가 돈을 지급받은 첫 글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가족회의가 열렸다. 가족들은 이 일을 흔한 상황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넌 그리로 가야 할 사람인가 보다.”

  다들 공시생 생활을 하며 쭈글쭈글해진 나를 걱정한 모양이었다. 일이 이렇게 풀린 이상, 글을 제대로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가족들은 물었다. 어머니는 조건이 따로 있었다.

  “이왕 할 거면, 딱 부러지게 배우기부터 해라.”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라는 얘기였다.

  많은 작가들이 가족들을 설득하는 일에 애를 먹었다는데, 내 경우엔 그렇지 않았다. 몇 해를 공무원 시험에서 낙방하고, 시들시들하니 헤매던 내가 겪은 이 놀라운 만남이 가족들에게도 메시지가 되었던 것 같다.

  서울로 갈 순 없었다. 학비는 전액 장학금을 받아야만 했고, 생활비가 빠듯했다.

  대전에 문창과를 둔 대학은 대전대학교와 한남대학교가 있었다. A4지 한 장을 꽉 채워 편지를 썼다. 안녕하세요, 이중세라고 합니다. 글을 쓰고픈 생각이 있어 편지를 씁니다. 학비는 얼마인가요. 가면 뭘 배우나요. 저는 소설에 관심이 있는데, 다른 장르는 뭘 배우나요. 거길 졸업하면 정말 글을 써서 살게 되나요. 거길 가기에 제가 너무 나이 든 게 아닐까요.

  각 학교 홈페이지에 나온 교수님 명단을 보고 과사무실을 주소로 해서 한 통 한 통 보냈다. 기억에, 양쪽 대략 십여 통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사흘이 지나자, 전화가 왔다.

  “나 한남대 문창과 교수인데요…….”

  너무 놀라 누군지 이름도 제대로 못 알아들은 채, 나는 학비가 얼마며, 뭘 배우며, 커리큘럼이 어떻다는 얘기를 네네 대답하며 들었다. 전화를 끊고서, 뭔가 순서대로 다 전달받은 것 같은데 여전히 뭔지도 모르게 멍한 기분이었다.

  3분 뒤에 다른 전화가 왔다.

  “이중세?”

  “네?”

  “나 대전대 김명호야.”

  “네…… 네?”

  “어디야.”

  “집인데요.”

  “지금 당장 내 방으로 와.”

  택시를 잡아타고 대전대로 후다닥 갔다. 택시비가 12,900원이 나왔고, 그건 내 사흘 생활비였다.

  김명호(가명) 교수님의 방은 창학관 2층에 자리했다. 장황하고도 번다한 환영인사 뒤에 그분은 이렇게 덧붙이셨다.

  “이중세, 너를 우리 대전대 문창과 교수 전원이 열렬히 환영하기로 했어. 그러니 넌 그냥 들어와서 열심히 쓰면 돼! 응, 이제 가봐.”

  김명호 교수님 방을 노크한 지 3분 30초 정도 지난 뒤, 난 대전대학교 정문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결정을 했다. 전화로 드문드문 알려주는 분보다야, 이렇게 확 잡아당기는 분이 낫겠다.

  결정된 건 첫 학기 등록금 면제뿐이었다. 나머지는 내부에서 따내야 했다. 집에 돌아와서, 먼지 덮인 두꺼운 파일을 꺼냈다. 청주에서 학교 다닐 때, 매일 두어 시간씩 쓰던 글들을 인쇄해 둔 A4지로 340장이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쓰』 같은 소설에 영향을 받은 그 글들은 『임진전쟁』이라는 장편소설이었는데, 문제는 책 2권 분량의 글이 진행되었음에도 아직 임진왜란이 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게 내가 쓴 첫 소설이자, 끝내지 못한 마지막 글이었다.

  그걸 쓰거나 마무리하려고 문창과에 들어가려 했던 건 아니었다. 우연히 대필작가가 되었으니, 글솜씨를 다듬어 그런 일들로 생계를 꾸려야지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뭔가 글을 쓰고 싶은 열망과 그게 얼비쳐 만들어진 행동들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는 건지 개념을 정립하고 싶었고 혼자만의 생각과 글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문창과 수업을 들으면 그런 것들이 해결될 테지. 그러면서 뭔가 내 앞길을 흐리고 있는 안개들이 걷혀나갈 거라 생각했다. 뭔가 똑 부러진 목적의식을 지니고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내가 어떤 글을 쓰고파 했는지, 나 또한 잘 모르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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