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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세 Aug 22. 2024

Drowning man

Chap. 2 : 따분한 인간의, 골이 따분한 20대 시절

  이 챕터는 꽤나 지루할 거다.     

  우리라는 각 존재의 근원에, 일정한 바탕이 자리하는 건 확실하다. 그 바탕은 유전적, 환경적 요인으로 이뤄져 있는데, 보통은 유년시절이나 그 부모의 됨됨이를 살핀다.

  부모님은…… 평범한 분이시다. 책을 싫어하진 않으시는데, 그렇다고 사서 읽진 않으신다. 아버진 작가인 아들이 쓴 책도 안 읽으시는 것 같고, 어머닌…….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부모님도 설득 못 시킨 글로, 대중을 어떻게 설득시키려 했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낸 『나쁜 검사들』은 꽤 재미있을 테니, 읽어보시길 권해드려야겠고.

  일가친척 양쪽으로 글과 관계된 사람은 오직 한 분뿐이다. 현대문학에 시로 등단하신 이○○ 시인께서 내 큰아버지이시다. 이 분은 서울에 의대를 수석입학하고 수석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랭킹 5위에 드는 심장의학 전문의가 되셔서 서울삼성병원이 세워질 때 초빙되어 돌아오셨던 분이시다. 미국에까지 이름을  날린 심장전문의이자, 시인이자, 나중엔 대학총장까지 하셨던 분이었다. 살면서 두 번쯤 뵌 것 같고, 그나마도 할머니 장례식 때였으니, 종로에서 마주쳤으면 서로 몰라볼 처지다.

  그러니 유전적 요인은 없는 듯하다. 있어도 아주 저 위에 머물던 요인이 랜덤 하게 걸린 것두 같고.

  이제 유년을 되돌아볼 때인가?

  나는 예전 일을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니고, 그리 관심도 없다. 그러니 내가 기억한다는 건, 꽤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베란다 밖으로 아파트 단지 내에 애들이 뛰어노는 걸 보던 기억이 난다. 잔디가 푸르른 걸 보니 5월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집 밖에 나가길 싫어하는 소년이었고, 신문지로 딱지 하나 접을 줄 모르는 아이-그건 지금도 그렇다-였다. 어머니는 지금도 딱지를 잘 접었고, 그래서 온 집안 신문지를 다 모아 딱지 십여 개를 접어주셨다.

  “가서, 같이 치고 와. 이거 다 잃어도 돼.”

  내보내고 잘 노나 싶어 나와본 어머니는 내가 계단에 앉아 딱지를 뜯어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셨다고 한다.

  이건 내가 MBTI에서 아주 강한 I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한편으로 이건 폐쇄적인 성격,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미숙함, 그만큼이나 강한 자기만의 지점을 지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초등학생-당시엔 국민학교였다만-이었을 때엔 책을 읽으면서 다녔다. 책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지루함을 못 견뎠기 때문이었다. 난 지금도 지루하거나, 지루하게 만드는 모든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이야기의 세계에 어릴 적부터 깊이 빠졌다거나, 이야기에 심취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읽었던 것들이 나의 바탕을 이룬 건 확실하다. 바탕을 이룬 것들을 따로 또 있다.

  수많은 게임들이 당시의 내 시간을 앗아갔고, 내 마음의 지평에 거대한 왕국을 세워놨다. <원숭이 섬의 비밀 2>, 코에이 <삼국지>와 블리자드의 <디아블로> 모든 시리즈, <대항해시대 2>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야기성이 높은 게임들을 좋아했고, 플레이하는 모든 시간 내내 그 세계에 흠뻑 젖었었다.

  그 세계들은 여전히 내 영혼에 거대한 영토를 이루고 있고, 때때로 거기에서 쏘아진 날카로운 빛들이 내 작품의 어느 언저리에 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대학은 생명과학부를 갔다. 수능 성적에 맞춰서 택한 전공이었다. 생명과학을 좋아했고 흥미도 있었지만, 다른 삶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당시엔 96년도였고, 대학 내에 한 움큼의 낭만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과대표를 하고, D 2개에 F 5개를 맞았다. 별일 없었다. 군대 다녀와서 어느 정도 전공 점수 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꿍꿍이는 다른 데에 있었다. 나는 공무원 시험을 볼 작정이었다. 당시는 공무원 시험 응시율이 무척 낮았다. 과사 앞에 있는데, 졸업을 앞둔 89학번 선배들이 뭔가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과사 앞에 비치된 응시서류를 보면서 현대에 지원할지 삼성에 서류를 넣을지를 얘기하고 있었다. 내면, 입사가 되는 시기였다. 선배들은 어느 기업이 나을지 저울질하고 있었다. 대기업 취업을 대학생들이 견주는, 지금은 상상 못 할 풍경이었다. 당시엔 대기업들이 대학교를 돌며 신입사원유치활동을 벌였다. 대학에 막 들어간 난 대기업이 안 되면 공무원이라도 하지 싶었다.

  그 모든 계획을 IMF 사태가 산산이 부숴놓았다.

  방만하게 경영되었던 기업들이 수없이 도산했고, 직장을 잃은 절망한 사람들이 비관해 자살했다. IMF 사태를 기점으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지점으로 넘어가버렸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살던 모든 이들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취직을 대강 정했던 건, 글쓰기 때문이었다. 9 to 6로 살고, 나머지 시간에 글쟁이로 살려고 했다. 공무원 응시율도 몹시 낮으니, 작정하고 6개월이면 붙겠다 싶었다. 당시엔 그게 오만이 아니라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도리어 대기업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 나약한 결심이라 여겨지던 시기였다.

  IMF 사태가 터지고 나서 군대에 갔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가족의 뜻에 맞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공무원 응시는 고시가 되어 있었다.

  하라니까 하는데 왜 하는지를 모르겠는 사람은 그 일의 영속성에 질려버리고, 이 공포는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든다. 내가 볼 땐,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는 직종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위협에 놓여 있다. 그 핵심엔 공무원이 자리했다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공부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나는 공무원 사회라는 영속된 무한루프에 내 발로 들어간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한편으론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도 막막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어느 가수가 다른 가수들 앞에서 질문을 받는 광경을 보았다. 자주 듣는 곡과, 부르고 싶은 곡과, 평소 부르는 노래를 물었는데, 그 가수가 말한 곡들이 저마다 각각이어서 핀잔을 듣는 장면이었다. 내가 읽어온 건 내가 쓰고픈 것과 비슷하지만 달랐고, 출판시장에는 내가 읽고 싶은 것이나 내가 쓰고 싶은 것들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당시엔 내가 뭘 쓰고 싶은가를 잘 몰랐다. 물론 지금은 내가 뭘 쓰고 싶어 하는지, 어떤 영역의 글이 내 창작 욕구를 건드리는지, 잘 안다. 당시의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 있다면, 지금의 나는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써, 그냥 당신 두개골 밑에 있는 뭔가를 글자로 풀어내.

  두려움 없이, 써.

  그러다 보면, 당신이 뱉어낸 글들이, 당신이 써 내려가야 할 방향을 짚어줄 거니까.

  하지만 당시엔, 그리고 지금에도 내겐 그런 조언을 해줄 사람이 전혀 없었다.

  충북대 도서관에 살았다. 책을 쌓고는 그냥 이리저리 펼치며 읽어댔다. 지금 생각하면 공무원 공부로부터 달아나려 그랬던 것 같다. 읽을 수 있는 책은 죄다 읽었다. 주로 사회학이나 정신분석학 책이 많았다. 당시에 소설 읽기를 등한시했던 건 후회된다. 하지만 난 그걸 읽으면, 그나마 붙들고 있는 공부마저도 내던질 것 같았다. 어쩌면 당시에 소설을 읽었다면, 나는 그즈음에 글쓰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공부로부터 달아나려 했던 시기의 정점에 교회가 자리한다.

  4학년 2학기가 막 시작된 가을에, 충남대학교로 걸어가는 중에 누가 나를 붙들었다. 마르고 체구가 작지만 인상이 선한 여자분이셨다.

  “우리 교회에 나와볼래요? 좋은 곳이에요.”

  그즈음 난 술과 담배에 찌든, 머리만 크고 행동은 굼뜬 되바라진 청년이었으므로, 시답지 않은 눈길로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그분은 마법의 단어를 말씀하셨고, 난 백기투항했다.

  “우리 교회 자매들이 아주 예뻐요.”

  나는 곧장 전화번호를 주었고, 그러고는 잊어버렸다. 학사 졸업논문을 쓸 레퍼런스를 잡아두기 위해 간 충남대학교였는데, 1년에 한두 번 갈까 하는 길에 전도를 받은 거였다.

  그 뒤로 끊임없이 전화가 왔다. 언제 한 번 와요. 이번에 전도축제가 있는데. 나 기억나죠? 예배 같이 드려요.

  참 좋던 인상이 다 잊힐 정도로 버텼으니, 석 달은 좋이 지나서야 그 교회를 갔던 것 같다. 지금은 없어진, 유성사거리 안쪽에 자리했던 <주아내 장로교회>였다. 전도를 하던 분은 당시 그 교회 부목사님인 박상진(가명) 목사의 사모님인 조수아(가명) 사모였고, 담배냄새에도 불구하고 내색 않고 내 첫 예배를 내 옆에서 드려주셨다.

  두어 달 뒤 나는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담배를 끊었다. 그리고 매일의 새벽기도와 수요 예배와 금요철야기도와 일요일 예배를 전부 드렸다. 당시 교회에서 별명이 전도사였다. 절반 이상은 종교적 열심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쯤은 회피였다. 나는 책상이 두려워 교회로 도망갔고, 수험생이라는 정해진 틀을 마치면 공무원이라는 새로운 틀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 틀거리가, 남에겐 해방에 가까운 그 루트가 결박 같이 느껴져 싫었다.

  당시 나는 헤매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 27개를 하면서 뭔가를 가늠했던 것 같다. 측량 보조로 반사경을 들고 다니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뛰었다. 하수구 맨홀 아래 얼마나 많은 벌레가 존재하는지, 거길 들어가 전선을 들어내던 나는 안다. 서빙을 하면서 사장에게 들었던 훈계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딜 가든 청소가 기본이야. 그 말이 내가 지닌 청결의식의 절반쯤을 차지한다. 나머진 내 깔끔쟁이 아버지를 보고 배운 것들이다. 공사판에서 벽돌도 지었고, 비계도 탔고, 빌딩 창문 닦으러 로프 타는 일은 온갖 욕을 들으면서도 끝내 못했다. 폐기물 수거함에서 꺼낸 버려진 옷들에서 그렇게 많은 먼지가 이는지도 그즈음 처음 알았다. 산처럼 쌓인 폐기물 옷을 분류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비염이 심해졌다. 그러나 모두 귀한 직업이고 알찬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픈 일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20대의 나는 그게 정확히 글쓰기인지 확신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청년들이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말을 이해한다. 당신들에겐 헤맬 권리가 있다. 당시 내가 헤맸을 때보다 더.

  교회를 언급하는 건 내가 직면한 두려움에 대한 회피를 얘기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중요한 챕터로 넘어가는 중요한 길목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교역자들은 자주 임지를 바꿔야 했고, 박목사님 부부도 어느 날 갑자기 교회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떠나기 직전에 조수아 사모님은 교회 내 소식지를 만드는 일을 맡으셨고, 도움을 청하셔서 나도 거들게 되었다. 교회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꼭지 글을 쓰는 일이었는데, 꽤나 열심히 했다. 뭔가 글을 쓰고, 작지만 읽을거리를 만드는 일을 맛봤달까. 

  조수아 사모와의 만남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다음 챕터에서 다루겠다. 그래야 여러분들도 이다음을 읽으시겠지.

  아, 내가 뭘 쓰고 싶은지, 이제는 아느냐고? 그렇다, 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글, 그게 내가 쓰고픈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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