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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세 Aug 31. 2024

Drowning man

Chap. 6 : 아지트 속 원고에 파묻혀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작가에겐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스티븐 킹의 대답은 이렇다. 난 덜컹거리는 세탁기 위해서 타자를 쳤는데요.

  앨리스 먼로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저는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부엌 테이블에 앉아서 소설을 썼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잠에서 깨자마자 곧장 2층으로 갔고, 자신의 주스가 다 떨어지기 전까지 거기에서 연필로 소설을 써 내려갔다.

  내가 뭔가를 써 내려갈 곳은, 어디인가?     

  문창과에 편입한 뒤, 글을 써오던 공간은 우리 집 1층 다락이 붙은 방이었다. 아무것도 놓지 않으면 세 걸음 × 두 걸음 반이었고, 책으로 꽉 찬 책장을 벽에 두르고 책상을 놓고 가운데에 당시 코스트코에서 팔던 갈색 리클라이너를 놓으면, 공간 전체가 꽉 찼다. 아버지의 의족이 마루를 가로지르는 안온하고도 둔중한 진동 속에서, 마당을 돌본 어머니께서 대문 닫는 소리를 들으며 낡은 키보드를 두드렸었다.

  며칠 전,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만난 몇몇 작가들은 대부분 글을 쓸 곳을 찾아다니느라 고생이었다. 소설이나 시나리오 혹은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 대부분이 카페를 작업실 삼아 글을 쓴다. 모임 내내 작가들은 리필을 해주고 노래 볼륨을 낮춰주는 카페 이름을 공유하느라 바빴다. 몇몇은 도서관을 사용했고, 드물게 집에서 쓰거나 다락방을 사용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자기만의 작업실을 꿈꾸긴 마찬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다.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같아서는, 일하기 어렵다. 일터에서 풍겨 나는 은근한 긴장이, 거기에 진입하는 노동자를 환기시켜 주는 법이다.

  지방은 그런 면에서 서울보다 형편이 낫다. 책상과 창문과 책으로 꽉 찬 책장 몇 개로 그만인 자기만의 방이라면, 원룸이어도 좋을 테니까. 대전엔 아직 전세가 꽤 있고, 낙후된 동네일수록 괜찮은 전세방은 더 많다.

  가족들이 조심한다지만, 생활소음은 어쩔 수 없었다. 변동 집은 지은 지 꽤 된 마당 딸린 단독주택이었고, 벽은 두터웠지만 나무로 만든 문이 얇았다. 쇠로 만든 바깥 대문이 닫히면 모든 방의 문들이 진동했고, 현관문을 이루는 간유리가 몇 초동안 달달 떨렸다. 주택들은 간격이 좁았고, 여러 소리들이 가까이 들렸다. 왼쪽 집 2층에는 거동이 어려운 환자가 지냈고, 종종 괴롭고 아픈 목소리로 아래층에 있는 엄마를 구슬피 불렀다. 그 반대편 집은 자녀가 다섯이나 되는 다문화가정이 살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서로를 불러대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상황이 그랬지만, 당장 작업실을 얻을 돈은 없었다. 웃풍이 심하고 바깥소리가 심하게 넘어오던 그 방에서 소설을 쓰며 2009년부터 2012년까지를 살았다.

  상황은 겨울에 바뀌었다. 선산 인근에 도로가 나 문중 소유의 땅이 보상처분을 받았다. 그 돈은 문중 사람들의 머릿수대로 배분되었는데, 내 몫으로 나온 돈이면 원룸 전세를 구할 만했다. 집에서 걸어서 12분이면 가는, 원룸 건물 3층이 내 첫 작업실이 되었다. 가지고 있던 책장을 넣느라, 싱크대 옆 좁은 통로가 꽉 찼고, 원룸 사방 벽은 책장으로 빼곡 둘러졌다. 책장으로 반쯤 가려진 창문 아래가 유일하가 볕이 드는 공간이었다.

  사과상자 하나 분량의 글을 써놓고 있어라. 정순진 교수님께서 종종 하시던 말씀이셨다. 200자 원고지 분량의 부피였으니, 대략 십여 편을 가리키신 말씀이었을 것이다. 졸업 직전인 2013년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단 한 번의 휴가도 없이 매일 썼고, 사과상자는 두 개째를 채워가고 있건만, 나는 어느 한 곳에도 당선이 되질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쓰는 게 과연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나의 문학으로 세상을 전복시키고, 내 소설로 세상을 뒤흔들겠다는 배포는 애초에 사라지고 없었다. 중간에 2년 휴학으로 2년을 진득하니 소설을 쓰는 과정이 없었으면, 당초에 끝났어야 했을 학업이었다. 가족들은 별 말 하지 않았지만, 나는 괴로웠다. 공모전용 단편소설이 따로 존재하나? 공모전 당선작을 샅샅이 읽었지만 다 좋은 소설이라곤 할 수 없었다. 몇몇 경탄하게 만드는 단편들이 있었고, 그런 정도의 완성도로까지 내 습작들을 밀어 올려야 하는구나를 느끼긴 했다. 이렇게 써야 당선되는구나를 알게 되었다면, 내 작품을 그리 비틀어 다시 썼을 것이다. 정답을 알았더라면, 거기에 맞게 썼을 것이다.

  졸업을 앞두자, 대학생 문학상 투고도 그나마 불가능해진다는 생각에 조바심은 더욱 커졌다. 목표는 문지, 문학동네, 창비, 문예중앙, 자음과모음 등 문예지의 신인문학상과, 12월 초에 집중되어 있는 신춘문예였다. 문예지는 마냥 기다리기 뭐 해 기다리길 잊었지만, 신춘은 후유증이 너무 컸다. 12월 7일 정도에 우편으로 보내놓으면, 당선 통보가 간다는 12월 20일까지 매일 피를 말렸다. 나중엔 현실 부정이 너무도 심해서 12월 26일에 신문사마다 전화를 걸어 당선 통보가 갔느냐고 미친 사람처럼 물어보기까지 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붙들려 있었다. 그런데 신인문학상과 신춘문예를 통과하지 않으면, 어떻게 작가가 되지? 등단이라는 건, 결국 제도권의 인정을 받고, 그들 중 하나가 된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런 인정을 받지 않은 채, 이 나라에서 문학을 하는 방법들을, 당시에도 몰랐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한국작가는 문학상 수상을 통해 작가가 되었고, 나도 반드시 그래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한편으로 나는 단편소설을 쓰기가 싫었다. 2009년도에 멋 모르고 썼을 때는 정말 신이 났다. 글이 좋아지고 실력이 차근차근 쌓이는 게, 주변에서 한눈에 알아볼 정도였다. 그러니 더욱 미쳐서 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걸 5년째 하니, 이 안에서 뭔가 새로운 게 나올 성싶지 않았다. 매번 새 단편소설을 구상하고 써 내려가는 한편, 신인문학상과 신춘문예에 대비해 썼던 글을 고치고 또 고쳤다. 더 나아지고 있는가? 오늘 고친 이 글이, 어제 고친 글과 뭐가 다른가? 나조차도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글을 쓰며 삶의 의미를 스스로 깨달았던 나는, 고친 글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 과정을 나는 내 첫 작업실에서 겪어나갔다.

  진절머리 나는 단편소설을 매번 고치면서 드문드문 자리한 신인문학상과 신춘문예를 대비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장편소설로 눈을 돌렸다. 나를 격동시키고 감동시켰던 장편소설들을 따로 모아 빼놓고는 자주 뒤적이며 감각을 익히려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다룰 수 있고, 다루고 싶은 이야기를 사냥하러, 늦도록 벌판을 뛰어다녔다.

  2013년에는 총 스무 곳에 원고를 냈다. 2013년 2월에 졸업했으니, 당장 뭐라도 되어야 할 판이었다. 내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나 혼자 급했다. 심사평에 내 소설이 언급되는데 왜 자꾸 미끄러지는지, 지금은 알지만 당시엔 그 이유가 납득이 안 됐다. 가장 미칠 것 같은 때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당선작을 읽을 때였다. 그렇게 마음이 상하고는 며칠 동안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책상을 비울 순 없었다. 2013년 신춘에 다 떨어지고, 그해 겨울이었을 거다. 창문을 열면 저 밖 공용주차장과 거기 들어찬 차들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공용주차장을 뱅뱅 돌며 희승과 통화를 했다. 그 2시간 13분이 내가 속을 털어놓은 유일한 시간이었다. 어린이집 다니는 아들은 제 아빠가 뭘 하는 사람인지 어렴풋이 아는 나이가 되고 있었고, 혼자 힘으로 생계를 꾸리는 아내는 힘에 부쳐하는 모양이었다. 30대 후반을 향해 가는 나이인데 부모님께 아들 구실은 못할망정 세상에 자리조차 못 잡고 있었다.

  나는 당선이라는 작은 구멍에 들어가기 위해 내 살을 잘라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나는 그걸 납득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 내면의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행동을, 나는 하면서도 괴로웠던 것이다. 나는 나를 경탄케 하고 즐겁게 만든 글이, 다른 사람들도 그리 만들 거고, 그런 역동성과 힘이 심사위원들을 설득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 믿음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 동안 매해 20회 이상 배반당했다. 그들이 믿으라 하지 않은 걸 내가 믿었기에 배반은 아닐지언정, 연거푸 낙선한 나는, 더 이상 무얼 어떻게 고치고 어떤 글을 써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문지기가 어떤 대가를 원하는지 몰라 묻고 묻고 또 묻는 지경이었다. 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든 건 그때뿐이 아니었다. 그건 낙선이 쌓이면서 내 정신 밑바닥에 고여 늘 출렁이던 괴로움이었다. 죽고픈 생각을 넘어, 2013년 초입엔 죽이고 싶다는 충동까지 들었다. 그건, 자기혐오였다. 나는 이 쳇바퀴에 자발적으로 매달린 나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한편으론 쳇바퀴와 철망과 빈약한 음식으로 구성된 나만의 작은 세상이 증오스러웠다. 이젠 그런 폭력적 충동과 결별했지만, 간혹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나는 증오를 품은 독이었다. 나는 한때 사랑을 잊고 세상을 흘겨보던 은둔자이자 아웃사이더였다. 답답함과 분노가 너무도 오랫동안 쌓여 나는 이후 오랫동안 그걸 내 마음 밖으로 내어버리려, 아주 많은 애를 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간혹.

  마음이 아프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당시엔 하루에 16시간씩 앉아 있었다. 젊어서 버텼고, 책임감으로 견뎠다. 2012년 막바지, 신춘 마감 직전엔 허벅지 경련이 몇 시간이나 멈추질 않았다. 왜 말을 듣지 않니. 내가 이걸 여기 앉아서 글을 고쳐야 하는데, 왜 내 집중을 방해하니. 내가 이걸 하겠다는데, 내 몸뚱이조차도 왜 나를 돕지 않는 거니. 주먹으로 멍이 들 정도로 덜덜 경련하는 허벅지를 때려댔다. 주먹질은 허벅지에서 시작해 가슴과 머리통으로 옮겨갔고, 손바닥으로 내 양쪽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답답해, 뭘 써내야 등단되는지 알려줘. 내가 왜 떨어지는지 알려줘.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줘. 나를 때리면서 나는 그런 말들을 내뱉었고, 내뱉는 와중에 꺽꺽 울었다.

  강박을 앓자마자, 난 그게 질환임을 인지했다. 하지만 병원을 다니고 싶진 않았다. 난 등단하면 이 문제가 자연히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간혹 심해졌지만, 나는 그 증상을 다스릴 수 있었다. 하지만 강박증은 허벅지 경련처럼 예측 못하게 불쑥 찾아오곤 했고, 그건 내게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 되고 말았다.

  가장 기대가 컸던 작품은 「쇼와 12년, 실화」였다. 난 이 작품이 왜 한 번조차도 최종심에 오르지 못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그걸 낼 수 있는 모든 공모전에 다 냈던 2012년의 좌절이 지금도 아프다. 내게 필요한 건 납득이었다. 경기에서 지는 건 괜찮다. 압도적인 기량 앞에서, 난 나의 부족을 당당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지조차 짐작 못할 장막 뒤의 심사였다. 낙선은 괜찮았다. 누가 내게 왜 떨어지는지를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두개골 아래 가득 차면, 며칠이고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가지고 있는 원고를 신인문학상과 신춘문예에 다 냈던 2012년 이후, 나는 다른 공모전으로 물러났다. 반드시 문예지 아니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리라는 고집을 버린 것이다. 무수한 공모전들이 있었지만, 거기 다 낼 순 없었다. 나름으로 권위가 있다고 여긴 곳에, 나는 조심스레 원고를 보냈다.

  전화는 오후에 왔다. 작업실에 있는데, 벨이 울렸고, 정말 묘한 예감이 들었다. 뭐랄까. 이 전환가 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경남 하동군은 드라마 <토지>를 촬영했던 한옥들을 활용해 매년 토지문학제를 열어 평사리문학대상을 선정해 왔다.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한 그 공모전에 뽑힌 내 소설은 「그래서 그들은 강으로 갔다」였다. 우연히 호랑이를 잡게 된 약초꾼 두 명이 호랑이가 흘린 피를 핥으며 따라오는 들개떼들로부터 달아나는 이야기였다. 들여다보게 만드는 섬세한 문장과 강렬한 표현 때문에 뽑았다는 심사평이 기억이 난다.

  늦은 오후였고, 유치원에 간 아이와 일터에 있던 아내는 아직 없었다. 집까지는 걸어서 12분이었고, 그날 처음 뛰어갔는데 5분이 걸렸다. 어머니는 마당을 쓸고 계셨다.

  “됐대, 됐대…….”

  “됐다고?”

  “됐대!”

  어머니랑 마당에서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다.

  이제 행복의 문이 열렸을까. 그렇진 않았다. 당선의 기쁨과 함께, 걱정이 몰려들었다. 이건 내가 들어가고파 했던 문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이젠 등단했으니, 더 이상 어느 문학상에도 원고를 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젠 뭘 해야 하지? 등단한 다음엔, 어딘가에 투고를 해 원고가 세상에 소개되고, 몇 번의 그런 과정을 거친 원고들을 모아 단행본을 내야 했다.

  그런데 내가 평사리문학대상을 탄 내가, 그런 과정을 거칠 수 있을까.

  시상식을 가는 와중에 그 생각에 짜증이 났다. 상금은 천만 원이었다. 한 편의 단편소설이 인정받았다는 증빙으론 지극히 컸지만, 내 또래의 연봉에는 비할 게 아니었다. 등단은 했다.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다. 이젠 등단을 위한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무얼 해야 하나.

  졸업 직전과 그 직후에 문학상 수상하기까지의 10개월. 그즈음에 다친 마음과 영혼은 아주 오래 후유증을 겪었다.

  대전 변동시장 뒤 공용주차장을 바라보던 49-10 302호의 그 방. 책장 때문에 창문이 막힌 그 방은 한낮에도 어두웠다. 내 삶 전체에서 가장 까맣던 나날들을, 견디고 또 견디려 나는 늘 스탠드 불을 켜뒀었다. 내일 오면 저 불을 보고 책상에 앉을 수 있게끔. 내가 비우고 가는 잠깐의 이 밤을 저 불이 채우게끔. 내게로 쏟아져 들어오는 저 까만 것들을 저 스탠드 불처럼 견딜 내 맘 속 여린 빛을 내가 기억하게끔.

  이제 다른 작업실로 이사했지만, 난 여전히 변동 작업실에의 책상과 의자를 쓴다. 바깥 거실엔 커다란 보이차 다구가 놓인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때 그 스탠드가 아직 거기 있다. 역전의 용사인만큼 한번 부러졌던 목엔 스카치테이프가 칭칭 감겨져 있고, 버튼 부분엔 아들이 붙인 스티커가 삐뚜름히 붙었지만, 불빛은 여전히 따뜻하니 밝다.

  비우고 나오는 지금의 작업실에, 난 간혹 스탠드 불을 켜두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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