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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세 Sep 03. 2024

Drowning man

Chap. 7 : 총을 쥐고 있는데, 바닥에 칼 한 자루가 보인다면

  지난 챕터에서, 모든 걸 다 밝힌 건 아니었다.     

  단편소설을 쓰고 그걸 고치기를 매일 하던 무렵, 골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돌파구가 필요해. 당시엔 문예지 신인문학상과 신춘문예에만 목을 매던 시기였기에, 때때로 너무나…… 한가했다.

  예술엔 여유가 필요하다. 돈과 시간에 대한 여유가 있으면 좋지만,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예술에 필요한 건 삶에 대한 느긋함과 여유로움이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자의식이 과잉된 사람들이고, 자기만의 방식-글, 가락, 그림, 움직임-을 통해 그것을 공감할 수 있게 내놓고자 한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에게는 느긋함과 여유가 태생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인정받고자 하는 열정이 가늠 못 할 지경으로 격렬하고, 뿜어져 나오는 열망의 가스로 그 자신의 내면이 뿌옇게 가득 찼기 때문이다.

  평사리문학대상에 「그래서 그들은 강으로 갔다」를 응모하기 전까지, 나는 다른 방식의 작업을 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단편소설만 조지기는…… 너무나 지겨웠다.

  우선은 장편소설을 쓰고 싶었다. 예전에 MBC에서 매주 하던 베스트극장이라는 드라마 단막극이 있었다. 매주 다른 60분 분량의 드라마는 일종의 단편소설인 셈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16편의 시리즈가 진짜였다. 보르헤스는 5쪽으로 되는 이야기가 10쪽일 필요는 없다고 했고, 할 수 있다면 단 하나의 문장으로도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리 있는 말이고 헤밍웨이가 그를 증명하기도 했지만, 대작은 결국 그 자신의 볼륨과 사이즈를 지니기 마련이다. 일정한 볼륨을 지니지 않으면 작품은 세계를 품기 어렵고, 적절한 분량-사이즈-이 없다면 독자는 상상력을 제대로 확장할 방법을 몰수당하는 꼴이 될 것이다.

  나는 제대로 된 장편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그즈음 나는 사무엘 상편과 하편을 읽는 중이었다. 그 유명한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고,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아이를 잃었다가 후에 아들인 압살롬이 일으킨 반란을 겪는 내용을 10여 차례 거푸 읽었다. 여기에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얘긴 다른 챕터에서 하겠다. 앞뒤로 붙어야 할 이야기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즈음에 시도했던 다른 방식의 글쓰기에 대해 말해야 한다.

  내가 지닌 게 무엇인가. 이면지를 꺼내놓고 쭉 쓰다가, 기말고사에 써냈던 희곡이 생각났다. 2012년 기말고사 즈음에, 수업을 맡았던 차근호 교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저기…… 어디 내볼까 하는데요.”

  “그래? (곰곰) 반반이야.”

  “(갸웃) 어떻게 반반이에요?”

  “심사위원이랑 맞으면 당선이구, 안 맞으면 뭐, 땡.”

  마지막 말은 하나 마나 한 말씀이었지만, 내 머릿속에서 폭죽 같은 불꽃을 내던 단어는 그것이었다. 반반.

  반이나 된다구?

  오랜만에 작품을 다시 읽었다. 내가 지금껏 읽은 희곡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두어 편이었고, 본 연극은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코미디 한 편이 전부였다. 나는 희곡에 대한 참고문헌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기말고사로 썼던 내 첫 희곡 <끈>은 괜찮은 지점이 많았다. 어쩌다 우연히 그랬겠지만, 등장인물의 수도 적절했고, 이야기의 볼륨이나 극적 효과도 꽤 좋았다. 나중에 안 개념이었지만 작품을 읽으며 연출가들은 그림이 그려지느냐를 중요하게 여겼다. 공연이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의미인데, <끈>이 그랬다. <끈>에는 좋은 대사들이 존재했다. 내게 자부심이 되는 그런 문장들이 <끈>에 자리했다.

  원고를 다듬었다. 이야기 자체를 손보는 수준은 아직 아니었는지, 문장 정도만 겨우 보는 수준이어서였는지, 대사를 말끔하게 손본 게 전부였다. 그리고는 가장 가까운 희곡 공모전인 2013년 목포문학상 희곡 부문에 냈다.

  그 결과가 2013년 10월에 통지되었다. 평사리문학대상을 받으러 경남 하동에 갔다 돌아온 지 사흘쯤 지난 뒤였다.

  당시 목포문학상은 신인상과 본상으로 나누어져, 나는 신인상 대상자였다. 그런데 예심위원-어떤 분인진 모른다-께서 내 작품을 본상 경쟁작으로 올려버렸다. 이 작품이 신인상으로 그치기엔 아깝다며.

  10월과 11월에 연거푸 문학상을 수상하니 좀 어리둥절했다. 그랬나. 그럼, 내가 겨냥하던 과녁들은 내가 겨눈 목표보다 이만큼이나 높았던 건가. 그렇다면 나는, 목표로 했던 문학적 지위에, 이만큼이나 낮은 실력과 수준이라는 의미인가.

  그러나 신세 한탄만 할 순 없었다. 이미 받은 문학상을 반납할 수도 없었고, 지금은 지금 지닌 지위 안에서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 목포문학상 시상식장에서 공연에 대해선 듣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영위에 전화했다.

  “제가 그제 상 받은 사람인데요.”

  “네.”

  “저기, 혹시 공연은 안 하시나요?”

  내가 문의한 건 이런 거였다. 공고문에 보면 수상작의 활용은 운영위에 5년간 귀속된다고 나와 있었다. 나는 그 의미가 뭔지 알고 싶었다. 내가 나중에 희곡집을 내기라도 하면 <끈>을 수록할 수 있느냐가 하나였고, 5년간 <끈>을 공연할 수 있는 권리가 내가 아닌 목포문학상 운영위에 속해 있는지도 궁금했다.

  공연할 수 없다면, 수상을 반납할 작정이었다.

  “7년간 14명에게 상을 줘왔지만, 이에 관해 묻는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이네요.”

  담당자는 내부 회의를 거쳐 답변을 주겠다고 덧붙였다.

  답은 사흘 뒤에 왔다. 공연과 출판 모두 가능하다, 단 목포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표기를 해주는 조건이었다. 2013년 겨울의 일이었다.

  문창과를 선택할 때 교수님들께 편지를 보냈던 기억이 났다. 공연은 극단이 하겠지. 하지만 아는 극단이 없었다. 그래서 난 네이버에 물어봤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서울에 8곳, 대전에 1곳, 그리고 전주에 1곳 극단을 찾아 편지를 썼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중세입니다. 목포문학상을 탔는데, 여기에선 공연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귀 극단에서 제 작품을 공연할 수 있는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원고를 동봉합니다. 읽어보시고, 연락해주십시오.

  몇 곳에서 전화가 왔을까? 2곳이었다. 서울에서 하나, 대전에서 하나.

  일요일 저녁이었다. 작업실에 갈까 말까 하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 조수형(가명)이에요.”

  “(모름) 네?”

  “사잇길(가칭), 조수형,”

  “(여전히) 네?”

  “(무식한 도깨비인가) 아…… 그, 보내준 원고 봤어요. 끈.”

  조수형 연출은 원고 내용의 일부를 칭찬하며 서울에서 미팅을 갖자고 제안하셨다. 두산아트센터였다.

  네이버에서 조수형을 쳐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에, 전화가 또 왔다. 다시금 모르는 번호였다.

  “나 극단 셰익스피어의 복영한이에요.”

  복 대표는 <끈>으로 2015 대한민국연극제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중에 배웠지만, 시도 내에서 극단들이 작품을 내 경연을 벌여 시도 대표를 뽑고, 그들이 개최도시에 모여 일주일가량 벌이는 경연대회가 대한민국연극제였다. 복 대표는 조수형 연출이 5분 전에 전화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기가 전화해서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10분 뒤에 전화가 왔다.

  “먼저 전화하셨다고, 양보 안 하시겠다네요. 이거 꼭 해보고 싶다고 그러시네. 아쉬워요.”

  나는 어느 분께 <끈>이 가는 게 나은 건지 전혀 감도 못 잡은 채 통화를 끊어야 했다. 네이버에 검색했는데, 조수형 연출의 공연 소식이 간혹 검색될 뿐, 정보량이 두 분 다 많지 않았다.

  나중에 복 대표께 조수형 연출에 관해 물으니,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수형 연출이 작품 하신다면, 다들 입이 헤 벌어질걸. 연극밥 먹는 사람치고, 극단 사잇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죄송합니다. 하긴, 저는 연극밥을 먹진 못했으니까요.

  두산아트센터는 아름다웠다. 제작 중인 무대 옆을 스태프들이 오갔고, 조수형 연출이 저 뒤로 비스듬히 서 있었다. 분장실은 영화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편안한 의자가 놓인 공간에 큰 전구가 주변에 박힌 거울들. 거기에서 조수형 연출은 내 <끈>에 대한 의견을 찬찬히 풀었다. 좋은 작품이고, 해보고 싶다. 내가 바꿀 테지만, 많이는 아닐 거다. 전체 틀거리나 대사가 좋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나. 다른 작품 써놓은 것 있나.

  말미에 조 연출은 묘한 말을 덧붙였다.

  “내가 지원금을 받으면 여기 두산아트센터에서 하려고 해요. 근데 지원금이 내가 하면 거의 받긴 하는데. 요새 좀 일이 있어서.”

  악수하고 헤어지곤, 난 객석에 앉아 무대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30분간 쳐다보았다. 여기에서 <끈>이 공연된다고.

  감격스러운 한편, 어이없기도 했다. 저건 그냥 기말고사였는데. 내가 수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소설은 상 하나 달랑 받고, 어디 다른 작품을 실을 기회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데.

  그리고 두 달 뒤, 조수형 연출께 전화가 왔다,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는.
   “그거 없인 할 수 없어요. 내가 위에 찍힌 게 있는데, 이렇게 대답이 오네.”

  그게 2014년 연극계에서 겪은 첫 낙담이었다. 2017년에 불거진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가 드러나자, 조수형 연출이 연극계 블랙리스트 1호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3년 국립극단과 함께 만든 연극 <두꺼비>(가칭)에서는 박정희를 전 대통령을 암시하는 인물이 국정원 댓글 공작을 두둔하는 듯한 대사를 낸다. 보수 매체에서의 질타는 있었지만, 그게 지원금을 끊기게 만들고, 이후 예술 활동을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지, 우리 모두는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조수형 연출이야 이후 명예를 회복하고 고난받았다는 사실이 주목받으며 존중을 얻었지만, 가능하리라 믿었던 공연이 지원금이 끊기며 무산된 내 상황을 인지하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었다. 나는 곧장 복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랑 공연할 팔자인가 보네요. 내일 말고 모레 건너오세요. 상의 좀 해요.”

  복 대표는 다음 해 대한민국연극제에 출품하자고 말했다. 그를 위해 한 달 공연을 하고, 예심으로 가고, 본심에서 성과를 내자는 계획이었다. 본심에서 수상하면, 그 명분으로 다시 지원금을 신청해서 대전이든 서울이든 공연을 이어가자는 제안에 동의하고 계약서를 썼다.

  2015년이 되자마자 대전에서 한 달 공연을 올렸다. 대전 가장 괜찮은 소극장인 상상아트홀에서 공연으로 한 달 다지고, 이후 대전 지역 예선을 뚫고 대한민국연극제에 도전하자는 계획……. 계획은 항상 그럴듯하기 마련이고, 세상은 단단한 주먹으로 그걸 무참히 바수기를 기뻐한다. 나는 예선 격인 대전연극제에서 희곡상을 받았지만, 본선 진출권은 다른 팀이 가져갔다. 뭐가 문제인지 얘기하는 게 중요하진 않다. 팀의 실패는 팀 전체의 실패이다. 팀의 성공은 개인의 실패를 가려준다. 우리는 실패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그 당시 배웠지만, 즉각 실천하지 못한 깨달음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막힌 사람이라, 일부러라도 자꾸 틔워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상황이 열린다.

  하던 대로 하면, 살던 대로 살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으로 해야, 다른 상황을 맞이한다.

  두 개의 문이 열리면서, 내가 썼던 것들의 성향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두 개의 장르를 동시에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꼬리를 흔들지 않으면 상어는 가라앉는 법이고, 자면서도 몸을 움직이기에 상어는 상어인 법이다.

  마지막으로.

  총을 쥐고 있는데 바닥에 칼 한 자루가 보인다면, 당신은 어찌할 것인가?

  얼른 허리를 굽혀 그것마저 집어 들어라. 당신이 재장전할 탄창이 충분하더라도 세상은 악당들로 그득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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