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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멈블비 Sep 20. 2024

은행 미끄럼틀

우리 골목에는 은행이 있었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자주 은행에 놀러 갔다. 놀러 갔다고 해도 안에서 노닥거리면 혼날 게 뻔해서 은행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계단에서 놀았다. 우리 동네의 건물들은 빨간 벽돌로 지어진 죄다 비슷한 양식이었는데, 은행만큼은 바로 바닥에 입구가 있는 게 아니라 돌로 된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높이가 있는 구조였다. 주 고객층이었던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은 고개를 숙이고 오랜 시간을 들여 한 계단 계단 정성껏 걸음 했다. 다른 건물들과는 위상을 달리하는 특별하고 중요한 장소라고 은연중에 말하는 것 같았지만, 어린 우리들에겐 그저 여름에 가끔 스며 나오는 에어컨 바람을 만끽할 장소였다.

윗 동네 애들은 아파트에 살아서 놀이터가 있다고 했다. 우르르 몰려가서 그네도 타고 뺑뺑이도 돌리던 참에 이건 우리 아파트 놀이터니까 너흰 타지 마라고, 얄미운 소리를 들어서 기분만 상했다. 그 후 더러워서 다시는 안 간다. 대신 우리는 은행 계단의 난간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놀았다. 반질반질 매끈한 돌로 된 난간은 어린 우리들 엉덩이에 딱 알맞은 너비였고, 여름에는 찹찹하게 시원하고 가을의 오후 햇볕에는 따뜻하게 데워져서 딱 좋았다.

미끄럼틀은 재미있다. 스륵 휭 하고 빠르게 미끄러진 후 반동을 살려 짧은 점프로 착지한다. 그날 입은 바지의 재질에 따라 좀 느리게 미끄러지기도 하지만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바지도 반질반질해져서 빨라진다. 그 짧은 순간의 즐거움을 계속하고 싶어서 다시 재빨리 계단을 뛰어오른다. 난간은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있으니 기다릴 필요는 없다. 누군가 타고 있다면 다른 쪽을 타면 그만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더 좋은 쪽이 있긴 하지만, 의견이 세고 목소리가 큰, 그래서 무서운 친구가 그쪽을 타고 있으면 나는 맞설 수 없다. 그래서 양쪽에 있는 난간이 다행이었다.

은행 앞에 바로 차도가 있어서 차가 지나다니고 버스가 왔다갔다 했다. 몇몇 지나가는 어른들이 너희 이런 데서 놀면 안된다고 혼내도 우리들은 겁이 나지 않았다. 미끄럼틀, 아니 돌로 된 난간은 매끈했고, 바지의 엉덩이 부분은 반질반질했고, 다리에는 힘이 넘쳐서 다시 뛰어오르려고 근질근질했다. 타다닥 하고 뛰어오르면 계단은 리듬 있게 발돋움해 주었다. 이 오르고 미끄러져 내리는 행위를 언제까지고 반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그 은행 계단과 우리 사이에 자성 같은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난간의 좌우로 다리를 걸치고 타는 것이 기본이고,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서 타기도 했다. 미끄러지는 와중 다리에 힘을 주면 언제라도 멈출 수 있었다. 우리는 점점 숙달되어 기차처럼 줄줄이 앉아서 타보기도 하고, 손을 맞잡고 앞뒤로 보며 서서 미끄러지기도, 심지어 거꾸로 누워서 타보기도 했다. 가능성은 무궁무진했고 우리는 이 은행의 비공식 미끄럼틀 고수가 되어갔다.


여름방학 때 시작해 계절이 변해도 학교만 끝나면 은행에서 만나 미끄럼틀을 탔다. 가방을 메고 타면 무거워서 빨리 내려간다고 웃었던 것 같고, 누구 지우개가 더 빨리 미끄러지는 지 같은 내기도 한것 같다. 우리가 왜 미끄럼틀을 그만 타게 되었는 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1997년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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