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멈블비 Sep 21. 2024

식물의 먹방

꽃이 피거나 열매가 자라는 것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지만, 나는 무엇보다 햇빛이 식물의 초록 잎사귀를 투과하는 빛에 매혹된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광이 나는 초록빛이 조명을 켜둔 것처럼 비추는 것을 몇 분이고 하염없이 바라본 적도 있다.


난 식물의 잎사귀에 햇빛이 투과하는 순간이 가장 좋아. 찬란하고 환상적이고 뭔가 눈을 뗄 수가 없어라고 남편에게 말했던 적이 있다. 그러자 남편은 그거 광합성이지? 식물이 영양을 섭취하는 방법이잖아. 그걸 보는 게 좋은 거야? 라고 물었다. 문득 그런가, 그럼 난 식물의 먹방을 보는 셈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엽록소는 주로 적색광과 청색광을 흡수하고, 덜 흡수되는 녹색광은 식물의 세포벽과 같은 구조에 의해 반사되기 때문에 식물이 녹색으로 보이게 된다(*위키백과) 고 읽었다. 왜 에너지 공급에 가장 적합한 녹색광을 반사하고 변동이 큰 빨간색과 파란색의 파장을 흡수하는지에 관한 진화론적 설명도 있었다. *참조: 하윤의 Resolution (3) 녹색의 역설 - 자연은 왜 녹색인가? Brunch.co.kr

아아, 하고 수긍이 가는 설명들이었다. 결국 식물은 가장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구나. 뭔가 가슴이 찡해졌다. 오랜 시간 동안 지구에 적응하면서 변동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방법으로 지구 전체 생명체를 받쳐주는 것이다. 내가 식물을 보며 얻는 깊은 위안은 어쩌면 생태계적 의존성에 기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내가 이 식물들을 키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나의 존재 자체가 이 식물들이 만들어낸 생태계 - 지구가 받는 태양에너지를 광합성 하여 다른 동물들에게 살아갈 에너지를 제공하고, 그들이 숨 쉴 수 있는 산소를 생성하는 - 즉 세계를 빚지고 있는 거였다.

취미가 뭐예요 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집에서 소소하게 식물을 키운다고 말했던 나의 대답과 대화들이 한순간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가볍게 느껴졌다. 오소소소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식물을 기르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식물이 그리 유인한 결과가 아닐까. 인간이라는, 산소가 꼭 필요하고 식물을 적극적으로 개량 재배하고 종자를 보존해 주는, 생물을 식물들이 취미로 키워보는 건 아닐까. 길고 긴 지구의 시간에서 인간의 자취는 식물에 비해 아주 짧을 뿐이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광합성만이 식물의 먹방은 아닐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광활한 아마존의 숲이 떠오른다. 어쩌면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푸른 빛 자체가 식물 먹방의 썸네일일지도 모른다.

모든 동물은 식물이 뿜어주는 산소를 소비한다. 생태계는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사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식물이 광합성으로 변환해 준 태양에너지를 먹으며 그들이 제공하는 산소로 숨 쉬다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 다시 식물이나 다른 생물체의 연료가 된다. 이렇게 보면 그들이 우리를 키운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나? 우리도 그들 먹방의 일부분이 아닐까?

안녕하세요! 여러분, 좋은 45억 년째 지구 시간입니다. 오늘은 인간들을 먹어볼 거예요. 400만 년 정도 살아온 비교적 최근에 유행하는 생명체인데요. 아주 잔망스러운 맛이 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유튜브 도입부를 상상한다.

작가의 이전글 은행 미끄럼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