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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vbe 글롭 Jun 08. 2022

그래, 그게 예술이었어

어린 시절의 내가 세상을 읽어내던 방식

   얼마 전 추천을 받아 감상하게 된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그 충격적이면서 여운이 남는 엔딩만큼이나 도입부도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영화는 영국의 시인 존 베처먼(Sir John Betjeman)의 인용구로 그 막을 올린다.


            "유년 시절은 청각과 후각과 시각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이성이 자라는 어둠의 시간이 시작되기 전의 시기이다."


            "Childhood is measured out by sounds and sights and smells,

                    before the dark of reason grows."

     

   실로 나의 유년은 그랬다. 이제는 꽤 까마득해진 그 어린 시절, 내가 오감을 통해 경험하는 것은 세상 그 자체였다. 사전 지식이나 고착화된 사고방식, 예지력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감각을 통해 직접 마주한 세상은 크리스마스처럼 새로운 일들과 즐거운 것이 가득했다. 그렇게 미지를 즐겁게 탐구하던 나는 진실로 탐험가였다. 그 시절 실제 장래 희망이었던 탐험가와는 표면적으로 약간은 다른 삶을 현재 살고 있지만 말이다.


   어른들에게, 특히 요즘 이 시대에는, 오감의 경우 보통 부가 서비스로 활용된다. 우리는 하루의 끔찍하게도 많은 부분을 다져진 습관과 이성을 통한 판단으로 살아내고 또 경험한다. 무의식적인 패턴에 의해서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고, 그에 반응한다. 우리가 사는 현재는 보통 '현재'가 아닌 경우가 많다. 프로그램 구현의 관점으로 볼 때 이는 과거에 더 가깝다. 그리고 남은 하루의 가능성마저 똑똑한 이성과 판단을 활용하여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안돼, 오늘은 어려워, 그래도 될까?, 나는 안돼, 그건 위험해, 나는 그게 싫어, 등등.


    그렇기에 오감은 습관과 이성을 실현하는 하나의 창구로 기능할 뿐, 진실한 세상의 거울이 되어주지 못한다. 내가 습관적인 반응 및 행동을 할 때 얻어지는 부수적인 감각이다. 매일 아침 의무적으로 사 먹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무의식에 각인한 아련한 향이랄까. 혹은 점심식사 중 정말 맛있다고 말은 하지만 오늘 오후 오기로 한 택배와 오전에 보내지 못한 메일을 떠올릴 때 혀끝에 약간 맴돌았던 그 맛 정도. 또, 논리적으로 원천 차단한 미래의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물리적인 움직임쯤일 것이다. 이것이 진정 축복일까 저주일까.


   그 답이 무엇이건 간에, 어린 시절의 우리처럼 오감으로 세상을 읽는 방법이 있다. 오감을 사용하도록 '유도'되는 것에 가깝겠지만, 그 가치는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듯 모르는 듯한 그 효과적인 방식은 바로 예술이다. 혹은 예술을 감상하는 것.


Processing / 2022.06.08 Wed. ©


   신선하고도 난해한 작품 앞에 서면, 우리의 묵은 해석의 습관은 가벼이 벗겨진다. 기존의 버릇에 가까운 신체적, 심리적 반응이 그제야 기능을 멈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어떠한가? 해석과 논리 또한 예술 앞에서 그 얄궂은 파괴력을 쉽게 잃고는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감상 방식은 항상 존재할뿐더러 이 과정을 권장하는 예술 사조가 시작된 지는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진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예술의 범위가 그보다 넓은 것은 언제나 사실이었다.


   작가도, 제목도, 그리고 나도 떠난 그 자리. 그 앞에 서서 나는 오감으로 낑낑댄다. 그 다섯 가지 감각을 동시에 모두 활용하지는 않더라도, 분명 그중 하나를 사용해서 무언가를 경험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작은 두뇌를 굴려 힘써 이해해 보려던 거대한 세상 앞에서처럼. 작은 삶의 힌트조차 큰 기쁨이 되던 그때의 나처럼.


   그렇게 오랜만에 오감을 일깨우고 나면, 파티에 지각한 우리의 습관과 이성이 뒤늦게 헐레벌떡 추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렇게 와서는 이거는 어떻고 저거는 어떻고 하는 소리를 늘어놓지만, 왠지 모를 개운함이 이미 나를 감싸고 있다. 그 오묘한 개운함은 어디서 찾아오는 것이며, 구성 성분은 무엇이냐는 말이다. 오감을 활용하는 것이 내 삶 속에 그렇게 희귀한 일이었다는 건가?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순간 나는 나로서 존재했다고, 나도 아직 순진한 면이 있다고. 그리고 호기심이 든다. 이 작가도 나와 같은 감정이었을까. 장소와 시간은 다르더라도 말이다. 오동통 손을 맞잡는 아가들처럼 같은 사람으로서 공유하는 공통의 감정에 대해서 떠올리고 기대한다. 그렇게,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또 한 뼘 자라고는 그 자리를 떠난다. 내면의 아이와의, 그리고 오감의 콘서트를 즐길 다음 만남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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