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과 사치, 그 모호한 줄 긋기. 나는 작대기를 놓기로 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가장 실용적이라고 '믿는' 결정들만을 반복한다면 우리의 하루는 어떤 모습일까? 돈, 체력, 그리고 시간 등을 비롯한 여러 지출과 비용을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그리고 가진 자원들을 가지고 오늘, 그리고 이후에 찾아올 다른 오늘에서 겪을 나의 생존과 그 확률을 높이기 위한 생산 활동에 몰두할 것이다.
어쩌면, 그 참으로도 실용적인 세계 안에서는 향긋한 한 잔의 커피는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정제된 하얀색 카페인 가루로 대체된다. 한 끼의 식사도 그 온기와 맛을 잃은 채 액체화 혹은 분말화되어 제공된다. 혹은 의식하기도 어렵게 나의 시스템 안으로 주입되겠지. 옷은 우리가 예전에 잃어버린 체모를 대신하기 위한 보온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이 오묘한 세상과 비교해 보면 우리가 꾸려가는 오늘, 혹은 삶은 상상 이상으로 비실용적이다. '생존'이라는 인류, 혹은 어떤 생명도 여태껏 리스트에 최상단에서 내린 적이 없던 목표는 많은 현대 사회에서 너무도 당연한 조건이 되었다. 그보다는 무엇을 먹고, 어떤 활동을 하고, 무엇을 사서 쓰고 - 어쩌면 아예 쓰지도 않지만 -, 어디를 가는지가 관심사다. 어찌 보면 생존 혹은 생명과는 큰 관련이 없는 그 지점에서 현대인의 기쁨이 발생하고, 우리는 다시 그 가치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그 기쁨이라는 감정은 실용적인 것인가? 혹은 무언가의 실용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을까? 생존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대상이 딱히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면, 어떤 출처의 기쁨까지가 실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해 맛없게 만드는, 혹은 온갖 수를 써서 저렴하게 만드는, 아니 어떻게든 가장 빠르게 만들어 내오는 식사가 실용적인 것일까? 쉽사리 정의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의의 어려움 속에서도, 누군가는 어디선가 자신의 눈에 들어온 무언가의 무가치함 혹은 납득할 수 없는 과대평가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열정적인 시위자의 일상이 얼마나 ‘비실용적인’ 일과 물건들로 가득 차 있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다. 예를 들어 카페를 가서 돈과 시간을 소모하는 행위를 비판하고는, 돌아서서 목적 없는 모바일 웹 서핑을 하는 식이다.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어느 극장, 한 발레리나의 손 끝이 1mm 움직일 때, 이 세상에는 아무 영향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동일하게 굶주리고, 또 다른 이는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더부룩함을 기어코 표현한다. 한편 우연히 극장을 지나던 한 사람은 비싼 발레 공연의 입장료를 비난하며 상상 속의 실용적이지 못한 관객을 조롱한다. 관람석의 어떤 이는 꾸벅 조느라 그 장면을 앞에 두고도 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발레리나에게는 이 짧은 순간과 1mm의 거리가 곧 우주의 완성이다. 또,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현악기 선율과 함께 그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는 무한한 영감이다. 생존, 삶, 혹은 죽음, 아픔, 이별 따위는 있었는지도 잊게 되는 충만.
곧 가치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자신이 부여한 믿음의 다른 이름이다. 세상에 대한 나의 솔직한 반응이자 곧 상호작용의 핵심이다. 실용성이라는 것 또한 가치의 한 가지 척도일 뿐 그 자체로 어떠한 객관성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환경 및 조건에 기반한 순간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종의 소통을 위한 약속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이 몹시도 비실용적인 세상을 억지스럽게 판단하거나 비하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누군가의 선택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실용적이었으며, 최선이라는 믿음을 그 당시에 반영했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기로 말이다. 이 마음가짐은 나 스스로에게도 오롯이 적용된다. 판단과 비하가 떠난 자리에는 연민과 이해가 남는다. 나도 이 세상도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100년 전에 비해 획기적으로 실용적이면서도 편리한 하루에 감사하며 살아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실용적인 삶의 태도가 아닐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