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어떻게 창작자를 아프게 하는가
나에게 음악은 항상 어려웠다.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시간 위로 무언가를 그려내는 것. 눈에도 보이고, 고칠 수도 있는 글 혹은 그림과는 영 달랐다. 지나간 과거 속에 영원히 새겨지는 나의 음표. 또한 내가 경험하기로는 음악이라는 존재는 더 감성적인 영역에 가까워 보였다. 정보를 논리적으로 전달하거나 무언가를 현실에 가깝게 묘사하기 위한 음악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가. 글과 그림보다는 기능이 더욱 예술에 특화된 미디어로 여겨졌다.
물론 창작의 고통은 음악가에게만 찾아오지 않는다.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은 쉬울 리 만무하다. 이론적으로 완전한 창작은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유전자를 반반 섞는 것을 한참 넘어서는 기적과 희생의 과정인 것과 같다. 그렇기에 모든 예술가에게는 뮤즈와의 이별에 대한 공포가 서려있다. 어찌나 두렵고 고통스러우면 작가의 벽, writer's block이라는 표현이 생겼을까.
혹은 뮤즈가 떠나기도 전에, 아예 찾아오지 않는 것은 어떤가. 분명 나를 표현하기 위해, 어떤 메시지 혹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내가 담아내고자 하는 것을 효과적이고 세련되게 가공할 수 있도록 지식과 기술을 익혔다. 그런데 내가 표현할 그것, 이 일을 시작한 첫 단추를 길 어딘가에 떨어뜨렸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난감하기 짝이 없다. 예술을 시작하며 이 훌륭한 도구를 통해 세상에 펼치고 싶었던 내 감정들. 그 끓어 넘치는 에너지와 영감들. 어디로 숨었지. 혹시 재거나 따지지 않고 달려 나가기에는 나는 너무 똑똑해져 버린 걸까. 어설픔이 부끄러운 전문가가 되어 버린 것일까.
프로, 전문가의 반대말은 아마추어이다. 그렇다면 아마추어는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는가? 전문성은 상업성, 혹은 수익성에서 나오는가? 이런 정의를 따지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예술을 사랑하기에 이 길에 들어섰던 나의 자아를 잃어버린다. 그 손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나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성장과 성숙을 기다리는 작품의 어설픔 혹은 미약함이 풍기는 '아마추어스러움'은 전문가에게 때론 견디기 어렵다. 이 부분에서 고뇌가 찾아오기도 한다. 훌륭한 결과물을 머리 혹은 마음속에 잔뜩 그리느라, 내가 작품에 담아낼 의미와 감정을 발견할 여유 혹은 정신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홀대받은 나의 주제, 의미, 메시지, 감정, 혹은 뮤즈는 상처받아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아마추어, amateur라는 단어는 '사랑하는 자'를 뜻하는 옛 프랑스어 ameour에서 발전하였다. 또 이 단어는 연인, 친구를 의미하는 라틴어 amatorem에 그 뿌리를 둔다. 결국 그 끝은 사랑에 닿는다. 직업성, 전문성의 결여보다는 무언가를 사랑하는지가 핵심이 된다. 사랑은 때로 어설프다. 사랑으로 빚어진 창조의 결과물은 그 초기에 항상 어설프고 미약하다. 어설픔까지 사랑할 수 있을 때, 나의 즐거움을 막는 거짓 자아를 버릴 수 있다. 그 자아는 멋진 가면으로 나의 약함을 가리고자 아등바등한다.
우리는 어쩌다 예술을 좋아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슬픈 감정이 벅차올랐다 할지라도 그 감정의 파도가 떠난 자리에는 멋진 풍경이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감동했다. 그 감동의 기법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이 음악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영화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결국 그 즐거움, 경험하는 이의 즐거움이 예술의 본질이다. 결국 그 생산자인 예술가는 즐겁게 하는 자, entertainer이다. 나는 그 본질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누군가가 정보를 얻어서, 감정을 해소해서, 혹은 유머를 통해서 즐겁지 않다면 나의 글은 의미 없는 선들의 조합이다. 어쩌면 심지어는 욕구의 결과물인 감정의 배설물 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어설픔을 안기로 했다. 나의 유약함을 끌어안아 타인의 즐거움으로 키워내기로 했다. 돌이켜보니 그랬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에서, 잘못된 음표가 시간 저 너머로 손 닿을 수 없도록 흘러가버린다 한들 이 우주에 재앙이 찾아 오지는 않았다. 그게 음악을 포함이든 다른 분야든 마찬가지였다. 너무 멀쩡해서 민망할 정도다. 그저 아름다운 악보를 연주할 새 기회가 주어질 뿐. 이 연습실의 대여시간이 언제 다할지 몰라도, 그 끝까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곡을 연주하고 싶다. 가끔은 귀를 막거나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서투를지라도 말이다.
불협화음을 만들 것만 같은 길 잃은 음표도 어쩌면 새 교향곡의 시작일 수 있다. 시작과 끝, 성공과 실패는 언제나 관점의 차이다. 이것이 비유가 아니라 진실임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안다. 오늘 다시 결심한다. 인생이라는 연습실에서 하나의 건반을 누르는 손 끝의 압력을 사랑하자. 찰나의 작용 반작용에 마음을 다하자. 그 진심 어린 시작에 뮤즈도 나의 편이 되어줄지 모르니. 그렇게 어떤 감동적인 음악이 내게 찾아올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