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맥베스>, 민음사
<창세기>에서 나타나는 히브리 인간관의 핵심은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에서 ‘생령’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페쉬 하야’는 ‘욕망’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인에게 인간이란 마치 굴렁쇠처럼 어디로 굴러갈지 예측할 수 없는 ‘욕망의 전차’ 같은 상태이다. 항상 무언가를 갈망하는 인간이란 생령으로서의 인간의 필연이다.
<맥베스>는 무제한적인 욕망 추구에 의한 인간의 정신적·도덕적 타락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인 한편, 동시에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찾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텍스트다. 맥베스와 맥베스의 부인은 권력탐욕형 인간의 전형이다. 맥베스 비극의 시작은 그의 권력을 향한 탐욕이다. 사망의 근원은 죄라고 하지만, 죄의 근원은 욕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인간이 행한 첫 범죄도 신이 되고자 하는 욕심에 의해서였다. 맥베스와 그의 부인 역시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욕망을 실현하면서 파멸해갔다. 이러한 관점에서 극의 내용을 재구성해보자.
어느 날 마녀 세 명이 맥베스 앞에 나타나서는 뜬금없는 예언을 한다.
“마녀 1: 맥베스를 환영하라! 글래미스 영주시다!
마녀 2: 맥베스를 환영하라! 코도의 영주시다!
마녀 3: 맥베스를 환영하라! 왕이 되실 분이다.” (1막 3장 48~50행)
사실 세 마녀가 한 말 중에서 진정한 예언은 왕이 될 것이라는 말밖에 없다. 그는 이미 글래미스 영주였고, 이전 장면에서 덩컨 왕이 맥베스를 코도의 영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순서상으로 코도의 영주로 임명된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마녀가 맥베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맥베스는 이 말을 듣는 순간에는 자신이 영주로 임명된 사실을 모른다. 그에게는 코도의 영주와 왕이 될 것이라는 말이 모두 예언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터무니없는 말이기에 그는 그 자리에서는 넘겨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왕을 알현하고, 자신이 코도의 영주로 임명되자 그는 마녀의 예언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두 진실이 밝혀졌다. 왕권을 주제로 한 웅대한 연극의 상서로운 서막으로. (중략) 이 불가사의한 간청은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없구나. 나쁜 것이라면 진실에서 출발하는 성공의 계약금을 왜 내게 주었을까? 난 코도 영주이다. 좋다면, 왜 내가 끔찍한 모습을 띤 유혹에 빠져들어 머리칼이 쭈뼛하고 안정된 내 심장이 정상을 벗어나 갈비뼈를 두드리지? 눈앞의 공포보다 끔찍한 상상이 더 무서운 법이다. 살인은 아직도 환상에 지나지 않건만 그 생각이 내 온몸을 거세게 뒤흔들어 심신의 기능이 억측으로 마비되니 없음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1막 3장 128~143행)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두 진실’과 ‘간청’이다. ‘두 진실’이란 글래미스 영주와 코도 영주를 말하는 것이다. 터무니없어 보였던 예언이 실현되자 왕을 향한 그의 욕망은 치솟는다. 애초에 실현할 수 없는 꿈에 대해서는 사람은 욕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현불가능할 줄 알았던 목표가 실현가능한 것으로 바뀌는 순간, 그는 이제 그 목표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욕망의 전차’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주목할 것은 그가 마녀들이 한 말을 ‘간청’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마녀의 예언은 ‘왕이 되실 분이다’이지 ‘왕이 되어 주시옵소서’가 아니다. 너무나 명백한 차이지만, 맥베스는 사태와 마녀의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왕권을 향한 욕심을 정당화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왜 기억을 조작(?)하면서까지 자신의 욕심을 정당화하려 한 것일까? 사실 왕이 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악은 아니다. 문제는, 역자 최종철이 지적한 것처럼, 그 실현 방식이다. 맥베스의 “욕망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게 되면 그것은 도덕적인 선과 악으로 양분되어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의 진정한 문제는 권력욕이 아니라 “그 욕망을 표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 구조이다.”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순간, 그는 너무 자연스럽게 왕을 죽이는 것부터 떠올린다. 아마 저 순간 그의 내면에서는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존재들이 있기에 덩컨 왕을 죽여서라도 자신이 왕좌를 차지해야 한다는 갈등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마녀의 예언은 간청이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왕을 죽인다는 죄책감이 덜 수 있었을 테니까. 이리하여 맥베스는 이제 왕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권력욕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 고민에 빠진다.
1막이 끝날 때까지, 맥베스는 계속 양심과 야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덩컨 왕은 너무나 겸손하게 왕권을 행사하고 그 권좌가 너무나 깨끗하여, 그 덕행은 이 크게 저주받을 암살에 맞서서 나팔 혀 단 천사처럼 그를 변호할 것이며, 연민은 벌거숭이 갓난아기 모습으로 돌풍에 걸터앉아, 아니면 천사처럼 형체 없는 기류의 말 등에 올라앉아 이 끔찍한 행위를 만인 눈에 띄게 하여 눈물은 바람을 잠재우리(1막 7장 12~18행).” 이 대사에서 맥베스는 자신이 덩컨 왕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매우 구체적으로 찾아낸다. 덩컨은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 그는 매우 선한 사람이다, 그래서 천사들이 덩컨의 덕행을 널리 전하고 맥베스의 악행을 알릴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를 잠재우고도 남는 강력한 반론 하나가 있다. 맥베스는 왕이 되고 싶다. 양심과 야심이라는 두 심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던 그는 결국 자신의 야심을 택하고 덩컨을 살해한다.
죄라는 것은 결정력을 지녀, 우선 실행되고 나면 양심을 마비시키고 사람을 계속 그 길로 몰고 간다. 왕이 된 맥베스는, 왕의 시조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마녀에게서 받은 자신의 부하 뱅코와 그의 아들을 자객을 통해 살해한다(아들은 다행히 살아서 도망친다). 자신이 가까스로 얻은 자리를 뱅코에게 빼앗길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떠한 망설임이나 갈등은 볼 수 없다.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맥더프의 부인과 아들을 죽이는 데 있어서도 그는 망설임이 없다. 덩컨을 죽였을 때는 고통스러워하던 맥베스가 극의 클라이맥스로 가서는 이렇게 말한다. “무서움의 맛을 나는 거의 잊어버렸다. (중략) 난 공포를 포식했어. 살기 품은 내 생각에 흔히 있는 전율에도 놀랄 수가 없으니까(5막 5장 9~15행).”
아내와의 공모로 거의 완전 범죄를 저지른 맥베스는 예언대로 왕이 되지만, 그 뒤에 남은 것은 공허함과 양심의 가책, 불안감뿐이었다. 뱅코와 정적에 대한 불안으로 맥베스는 그와 그 가족(맥더프의 부인과 아들)까지 죽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었음에도 채우지 못하는 공허함과 양심의 가책이 맥베스와 그의 부인을 고통스럽게 한다. “과인이 공포 속에 식사하고 이 무시무시한 악몽의 고통 속에 밤마다 떠느니, 차라리 우주는 해체되고 천지는 무너져라. 마음의 고문으로 안절부절 얼빠진 채 누워 있는 것보다 마음 편해 보자고 침묵시킨 죽은 자와 동거함이 더 낫겠소(맥베스, 3막 2장 16~22행).” “소득 없이 기진맥진, 만족 없는 욕심을 채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이고 불안한 기쁨을 느끼느니 죽임을 당하는 게 더 편한 법이다(맥베스 부인, 3막 2장 4~7행).”
역설적이게도 무제한적 욕망 추구의 마지막은 끝없는 공허함이다.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은 건데 소음, 광기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5막 5장 16~28행).” 맥베스는 양심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욕망을 극한까지 추구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최고의 권력을 획득한 자리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인생의 무의미함이었다.
그런데 “삶의 무의미를 이토록 깊이 꿰뚫어 보는 이 사람은 지상 최고의 권력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최대로 맛보려 했던 바로 그 맥베스”이다. 이 사실이 드러내는 바는, 인간은 허무함을 느낄 정도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정도로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라는 역설이다. 인간은 의미 있는 삶을 원하기에 욕망하고, 그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결국 맥베스의 비극이 드러내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은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