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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man Dec 25. 2020

오해와 아집을 넘어서서 고전 읽기

후쿠자와 유키치, 남상영 옮김, <학문의 권장>, 소화, 2003

   

책을 읽을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는 저자의 논리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보다 기존의 해석이나 자기 생각을 더 우선시하는 것이다. 특히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논란이 많은 사상가의 책을 읽으면,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이러한 독서의 단점을 하나 꼽자면, 기껏 시간을 내서 어려운 책을 읽었음에도 최종적으로 책 내용은 남지 않고 자기 생각만 재확인하고 끝날 수 있다는 점이다. 비판적 독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책 읽기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은 저자의 주장을 먼저 충실히 이해하는 독서법을 훈련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그를 탈아입구론의 창시자이자 일본의 침략적 행보를 앞서서 예비한 사상가로 묘사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일본의 야스카와 주노스케가 있다. 그의 저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이향철 역, 역사비평사)에 따르면,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민의 독립심 향상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방기한 일본 극우의 시조이자 일본의 제국주의에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이런 주장이 국내에서도 많이 퍼져 후쿠자와 유키치와 하면 으레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탈아론’이다. <문명론의 개략>과 <학문의 권장> 같은 후쿠자와의 초기 저작들도 ‘탈아론’을 중심으로 평가되는데, 이 저술들이 ‘탈아론’으로 가는 맹아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쿠자와에 대한 색안경을 낀 상태에서 그의 책을 읽으면, 당연히 모든 내용이 부정적으로 읽히며 그의 내용이나 원래 의도는 무시된 채 기존의 평가만을 답습할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어느 책을 읽든 기본적으로 지양해야 할 태도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다.     

또 한 가지, 고전을 읽을 때 특히 유념해야 하는 점은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을 쓰던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 토대 자체가 달랐다는 점이다. 물론 시대를 초월하는 메시지가 있기에 고전으로 읽히는 것이지만, 현재와 과거는 다른 시대였다는 점을 고려조차 안 한다면, 책의 메시지를 오독할 가능성이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우에도,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서 메이지유신이라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 쓰였다는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학문의 권장>의 내용은 너무나 단순하고 모순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은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초편)”로 시작하여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꺼리지 마라(17편)”로 끝나는데, 천부인권적 평등에서 시작하여 적극적인 인간 교제를 강조하며 마무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의 핵심은 이 두 문장 사이를 관통하는 일관된 논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초 하나의 저술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같은 주제로 여러 글을 쓴 것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학문의 권장>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확고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기에 책의 구성은 중구난방이지만, 열일곱 편의 글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강한 내적 일관성은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학문의 권장>을 쓴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변화한 시대에 맞는 사고를 갖추게 하기와 궁극적으로 서양 열강으로부터의 일본의 독립 수호 및 문명국 달성’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변화한 시대란, 당연히 도쿠가와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로의 전환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도쿠가와 시대 특유의 ‘이에’ 문화와 결부된 엄격한 신분제 질서를 증오하였다. 도쿠가와 사회는 한 신분 속에서 한 사람이 맡은 구체적인 직급마저 세습되었다. 이 때문에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신분의 한계로 능력을 펼칠 수 없었다. 하급 무사 집안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어렸을 적부터 그러한 일본의 불평등한 현실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 후쿠자와가 봤을 때, 세습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본인의 의지와 능력만 있으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하였다. “사민동등이라는 기본 정신이 확립되어 있으므로 누구라도 안심하고 오로지 천리에 따라 각자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면 된다(초편).” 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도, 그가 봤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엇이 변화했는지 잘 알지 못했고 도쿠가와 시대 때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을 유지했다. 그래서 그는 <학문의 권장>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에 무엇이 새롭고, 새로운 사회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학문의 권장>을 읽어야 그가 한 주장이 당시에 얼마나 새롭고 신선한 것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학문의 권장>에서 그가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내용들은 신분제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삶이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는 신분제에 예속되었던 사람들을 독립된 정신을 가진 독립된 주체로 만들고자 하였다. 구체적으로 ‘문명국 달성’이라는 지상과제에 있어 구시대의 관념을 폐기하여 “풍조(4편)”를 새롭게 바꾸는 노선을 취했는데, 이때 그가 강조한 것이 ‘천부인권’과 ‘독립심’이었다. 그래서 후쿠자와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평등한데, 이때의 “동등이란, 인간의 처해진 상태가 동등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통의(權利通義)가 동등하다고 하는 것이다(2편).” 이 권리통의(right의 번역어)는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누구도 이를 침해할 수 없다. 사람은 이 권리통의를 가졌다는 점에서 모두 평등하다. 그는 지위상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절대로 침해받을 수 없는 독립된 주체로서의 개인의 권리를 우선한다. 이러한 논리는 8편과 11편에서 더 발전하여, 누구도 타인의 신체를 자의적으로 조종할 수 없으며, “타인의 권리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자재로 자신의 신체를 활용(8편)”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남자와 여자 간에도, 지위고하의 여부를 막론하고 이 원리는 무조건적으로 적용돼야 한다. 급진적 평등주의자로서의 후쿠자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둘째, 후쿠자와의 관점에서, ‘독립심’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와 문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정신이었다. 독립적인 인간이란 어떠한 사람일까? 그는 독립을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유형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형의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물건에 관한 독립과 정신에 관한 독립이다(16편).” 전자는 경제나 물질적인 면을 스스로 해결하여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후자에 관한 논의는 15편과 16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5편에서 그는 단순히 전통이나 미신 등을 무비판적으로 따라 주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상태를 ‘혹닉(惑溺)’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당시에 서양의 문물만을 무조건 나은 것으로 보는 경향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16편 ‘가까운 곳부터 독립을 지키는 일’에서는 지나친 물욕으로 물건에 종속되는 것과 타인의 취향까지 모방하려는 작태를 비판하며 “정신의 독립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다시 한번 주체적이며 독립적으로 살 것을 강조한다.      


<학문의 권장>은 독립된 주체로서의 개인에서 시작하여 개인 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는데, 주로 <학문의 권장> 후반부에서 다루어진다. 이때 전제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개인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독립된 주체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과 사귀며 교제의 폭을 넓히려고 한다(9편).” 독립의 삶이 은둔의 삶은 아니다. 세상 속에서 많은 사물과 사람을 접하고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지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의 삶이다. 그 방법으로는 (1) 언어를 습득하고 연습하여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것, (2) 외모를 가꾸는 것, (3)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대하고 넓은 교제의 범위를 가지는 것이다. 외모를 가꾸는 것을 새삼 강조한 이유는, 이전 시대에는 같은 신분 내의 사람들끼리만 교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자신을 잘 보여야 할 필요도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후쿠자와가 사용하는 ‘교제’는 단순한 사교의 의미가 아니라 영어 society의 번역어이다. society는 기본적으로 수평적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가 독립된 개인에게 교제가 중요하다고 할 때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후쿠자와가 구상한 사회는 평등한 관계로서 성립되는 사회이며, 각 개인 사이의 자유로운 경쟁에 의해 사회와 문명은 진보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노력에 의해 생기는 결과에 원망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엄격한 신분제로 경쟁할 필요도 없었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성취할 수 없었기에 항상 원망과 질투가 있었다. 하지만 신시대에는 누구나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사회는 개인과 개인이 서로 경쟁할 수 있어야 하며, 경쟁에 따른 결과는 용인할 수 있어야 한다. 노력하지도 않고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고 원망하는 마음은 어떠한 이점도 없다는 후쿠자와의 말에는 이런 맥락이 있다(13편). 여기서 노력에 의한 차이는 긍정하는 것에 대해 의아할 수 있지만, 당시 인물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정도로만 이해하면 된다.     


개인-교제로 이어진 논의는 최종적으로 국가와 정치론으로도 연결된다. “자유와 독립은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에도 적용된다.” 즉, 국가 간의 관계가 개인 간의 관계와 같다는 것으로, 이것이 “일신 독립하여 일국 독립한다(초편)”는 말의 의미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후쿠자와는 6~7편에서 정치론을 전개한다. 그가 생각하는 문명국의 이상적인 정부와 인민의 관계는, 독립된 정신을 가지고 독립된 주체로 거듭난 문명국의 인민이 동등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약속에 입각하여 국가를 이루고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다. 후쿠자와에게 있어 정부란 인민의 권리통의를 보호하는 수단이다. 4~5편에서 후쿠자와는 모든 사태 해결을 정부에게만 맡기는 현상을 비판하며 민간이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힘을 키우고 정부에 자연스럽게 압박할 힘을 기를 것을 역설한다. 나라는 정부에 의해서만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되고, 민의가 반영되어 정부가 운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독립된 정신을 가진 인민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을 국법으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권리통의를 지키기 위해 능동적으로 인민이 국법을 만든 것이다. 국법을 지킨다는 것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민들이 약속하여 만든 국법을 개개인이 맘에 안 든다고 어기는 것은 문명국의 구성원답지 못한 행동이다. 단, 정부가 인민의 권리통의 보호라는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을 때, 인민은 정부를 압박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일부 주장처럼 후쿠자와가 선험적 국가론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주석에 대해서. 주석이 성의 없게 달린 것이 몇 개 있었다.

1) 4편의 각주 78: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신을 “중인 이상의 위치”에 있다고 지칭하는 부분이 있다. 이때 ‘중인’의 각주에 ‘중산층’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명백히 틀린 내용이다. “중인 이상”이라는 표현은, 유학을 공부한 한학자들이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부를 때 쓰는 겸양 표현이지, 서양의 미들클래스와는 관련이 없다.

2) 6편의 각주 96: “당시 일본의 천황은 신사를 숭배하는 신사의 신으로서 국민들에게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라는 내용도 실제 역사적 사실과 비교할 때 틀린 주석이다. 천황이 일반 사람들에게 지배자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것은 1880년대였고, 그 이전에는 영향력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천황이 일일이 전국을 순방하며 자신의 존재를 보여줘야 했을 정도였다.

3) 15편에서 ‘인사(人事)’를 사회라고 한 점이나, ‘격물궁리’를 화학이나 물리라고 한 것 역시 오히려 내용 이해를 방해하는 각주이다. 격물궁리를 화학/물리로 설명한 것은 격물궁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를 축소한 이해이다. ‘인사’를 왜 사회라고 설명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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