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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man Dec 30. 2020

운명에의 저항, 질서에의 순응

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4


본인에게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는 것보다 본인에게 주어진 지배 질서에 저항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권내현의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은 태어나기를 노비로 태어나고 그 후손들도 영원히 노비일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해방되고자 한 가계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사회의 지배 질서의 가치를 어떻게 내면화하는지 보여준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수봉과 그 후손들은 하천민이라는 신분제적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그들은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는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양반에 가까워지는” 데 힘을 쏟았던 것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자신의 삶이 정해져 있다. 조선 시대에서 노비는 “신분제의 속박에 따라 대대로 주인가에 예속된 소유물이었고, 주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들의 경제적 가치에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노비라는 굴레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이들은 크게 세 가지 선택을 취할 수가 있었다. 첫째는, 주인의 집에서 도망하여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길이다. 둘째, 난을 일으켜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길이 있다. 전자는 소극적 저항이고, 후자는 적극적 방식의 저항이다. 저항 외의 방법으로 셋째, 공을 세우거나 자신의 재산을 활용하는 등의 합법적인 면천이었다. 수봉이 택했던 길은 마지막 합법적 면천의 길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이라는 국가적 재난 상황은 어느 정도 재산을 소유한 일부 노비들에게는 신분 상승의 기회였다. “기근이 잦았던 숙종 대에 정부는 노비 면천을 인정하는 문서나 통정대부 등에 임명하는 공명첩을 팔아 진휼 재정을 확보”하였는데, 수봉은 국가에 자신의 재산 일부를 바치는 방식으로 노비에서 평민으로 신분이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평민이 된 수봉은 “노비라는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당시 자신이 살던 도산면에서(경북 안동) 가장 익숙한 본관과 성씨인 김해 김씨를 자신의 본관과 성관으로 삼았고, 이제 ‘김수봉’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유어 이름을 한자식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하였다. 고유어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 하천민의 이미지가 묻어나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는 거주지를 옮겼다. 물론 “오랫동안 만들어온 삶의 터전이 그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수봉의 아들과 그 후손들은 대체로 원래 살던 곳에 머물렀지만, 수봉의 둘째 아들 흥발은 두 차례나 그 삶의 터전을 바꾸었다. 흥발은 “양반들의 힘이 마을을 압도하지 않는” 장소로 거처를 옮겼고, 그의 후손들 또한 “전통 양반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평민들이 절대다수를 이루는” 등광에 새롭게 정착하였다. 이름과 사는 곳은 바꾼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새롭게 출발하거나 성장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따라서 수봉가의 행동에서 노비라는 과거를 숨기고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 한 욕구를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군역의 굴레는 평민이 된 이들에게 새로운 장애물이었다. 당시 군역은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하나는 군역의 대상이 평민에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노비는 기본적으로 군역의 대상자가 아니었고, 양반과 평민이 군역을 졌지만, 원래 군역 대상자였던 양반들이 빠져나가면서 평민만 군역을 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군역을 진다고 과거의 문이 더 열리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군역을 지는 일이 노비가 아니라는 의식보다 양반이 아니라는 자괴감으로 다가올 때, 그것은 또 다른 장애물이자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군역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실제 대상자가 아닌 사람도 군역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6세 이하 어린아이, 60세 이상의 노인, 심지어는 죽인 이들도 군역자가 된 것이다. 문제는 당시 군역 부담이 생계에 큰 짐이었다는 사실이다. 군역 대상자는 직접 군대에 가는 대신 1인당 군포 2필을 부과했는데, 1필의 길이는 대략 16m 정도라고 한다. 이를 전부 부담하려면, 그것도 실제 군역 대상자가 아닌 이들의 몫까지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조 때, “균역법의 실시로 부담이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평민인 이상 수봉의 후손들은 평생 군역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군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은 양반도 평민도 아닌 중간층에게 주어졌던 직역”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수봉의 손자와 증손자 대에 이르면, 중간층 직역으로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났고, 안정적으로 성장한 이들은 다시 가계를 윤색하여 평민이었던 조상들도 비군역자로 바꾸어놓았다. 더 나아가 수봉의 후손들은 양반으로의 상승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중간층 직역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수봉가는,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의 직역인 ‘유학’을 칭했고 그와 동시에 “유학이란 호칭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본관을 새롭게 바꾸는 한편, 양반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김해가 이들의 본관이었지만, 수봉의 고손자 김종욱은 안동으로 본관을 바꾸어 자신의 가계를 성장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외형적인 성장 외에”도 수봉의 후손들은 ‘양반처럼’ 가계 계승을 위해 아들을 입양하고 친족 집단 의식을 강화하는 등 양반의 부계친족 문화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전통 양반가가 봤을 때 이들은 양반이 아니었으며, 전통 양반들은 이 ‘야메’ 양반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양반’으로 가는 길은 매우 좁았다. 그 길을 뚫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학문적 소양이 필요했다. 따라서 “진정한 양반”이 되기 위하여 수봉과 같은 비양반층은 자제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 서당이 확산되면서 비양반층 자제들에 대한 교육 기회가 서서히 늘어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그들의 지향점은 양반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넘어야 할 마지막 장애물도 바로 양반이었다. 양반은 극복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19세기 후반, 선교사들의 교육 선교를 통해 많은 개종자가 생긴 것도 교육을 통한 상승 욕구가 발현된 한 예라고 볼 수 있겠다. 

    

하승우는 <신분피라미드사회>(이상북스, 2020)에서 현 한국 사회를 능력주의로 인한 새로운 세습 신분 사회라고 규정했다. ‘부모도 스펙’이라는 인식이 흔해질 정도로, 부모의 능력이 취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취업준비생 10명 중 6명 ‘부모도 스펙’>, 경향신문, 2020.11.09.). 그러나 개인의 의지와 무관한 출발선에 의해 개인의 삶이 결정되는 것은 심각한 불평등 문제거니와, 이 출발선 사이의 간극을 강하게 느낄수록 사회는 “신양반층” 사회 혹은 ‘신분 피라미드’ 사회로 변모해 간다. 오늘날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다시 교육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사회적 지위를 상승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의 교육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교육의 목표는 사회적 간극을 줄이기보다는 피라미드에서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에 맞춰져 있는 듯하다. 오늘날도 상류층은 다시금 극복의 대상이면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이 간극이 없어지지 않는 한, ‘수봉’은 이름만 달라진 채 어디에선가 계속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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