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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내가 꺼내 쓰는 이야기

(부제. 내가 넘은 한 고비)

by 장지
내가 수험생활 동안 공부한 시간을 기록한 달력

나는 마흔두 살에 중등학교 임용시험에 합격한 교사이다.


흔히 어릴 때, 선생님이 꿈이라고 말했던 어린이들이 교사라는 꿈을 이룬 것은 아니다. 애초에 사범대를 진학한 것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진로에는 항상 ‘문헌정보학과’를 적었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책 냄새나는 그곳이 늘 상상 속에서 꿈꾸는 로망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능 성적이 특정 대학 문헌정보학과를 쓰기에는 다소 애매했었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수능 성적에 맞춰서 진학한 학과에서 스무 살, 내 적성이 이것인가라는 고민은 뒤늦게 찾아왔었다. 무작정 열심히 했던 대학 성적이 그나마 위안이 되어 교직이수 과정으로 진로를 정하고, 교육학 관련 수업들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이를 점점 먹어가면서 선생님이 되고 싶어졌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얌전하고, 소극적이었다. 사립학교를 나와서 당시에는 늘 엄하고, 무서운 선생님들과 교칙들이 참 지우고 싶은 한 페이지 같던 학교로 기억이 된다. 그런데! 내가 선생님이라니.. 아마도 학문 속의 루소와 이상적인 교육학자들의 이론들을 배우면서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아무튼 주변에 교직의 꿈을 가진 어릴 적 친구들의 영향이었는지도 정말 모르겠다.


스물두 살, 세 살이 되면서 내가 점점 더 직업적으로 끌렸다. 교생 실습하는 동안도 너무 설레고, 떨리면서 89년생 중학생이었던 그 녀석들과 행복했다. 그리고 난 go! 그래 나는 이 직업이어야 내가 행복할 거라고 확신했다. 첫 임용 시험에 떨어지던 그때도, 재수를 거쳐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던 그날도, 마흔을 넘어 다시 가방을 싸고 임용시험을 치르러 가던 그날까지도.. 그냥 나는 내가 좋아하는 꿈을 꾸는 사람이라서 행복하다는 것은 분명히 내 안에서 알고 있었다.


현실을 마주해서, 꿈꾸는 일을 모두가 할 수 있지는 않다.

그리고 서글프지만, 너무나 잘 아는 나이이다.


인정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내가 가진 복은 그나마 그만하라고 말리는 가족은 없었다는 것이다. 남편도 아내로서 나만의 취미가 내가 좋아하는 공부라면, 하고 싶은 만큼 하라는 식이었고 시아버지 장례식을 치르고도 독서실 가서 시험 준비를 하라고 먼저 집으로 보내주었다.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이 시험은 늘 주변 가족들의 걱정거리가 될까 조바심을 내는 일상이었지만, 그래서 뜯어말리지 않은 내 가족들한테 지금도 고맙다고 말한다.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을 두고, 결혼하고 전공을 바꿔서 다시 서른일곱에 시작한 임용 공부는 내 나이를 서른일곱에 멈춰버린 듯했다. 나는 서른일곱부터 과락, 컷 근처, 다시 하향세, 1차 합격을 반복하면서 기복 있게 넘나들었고, 운동회의 ‘매달린 과자 먹기’ 경기처럼 내 입 앞에서 알짱거리는 과자같이 감질나게 이 시험을 못 벗어나게 만들었다.


“엄마, 괜찮아요. 다시 하면 꼭 합격할 거예요.”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위로하고, 달래주는 우리 아이들이 있었기에 어쩌면 ‘엄마가 다시 한번 해볼게!’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임용시험은 그래도 1년에 한 번이라 아쉽지만, 다시 시작할 계절과 마무리할 계절이 분명한 게 좋았다. 그 겨울은 힘들지만, 나는 다시 봄이 되면 일어설 수 있었다. 그 끝에 마흔두 살 이 나이에 드디어 신규발령을 받았다. 혹시나 이 길을 들어선 그들이 헤매고 있다면, 다시 일어서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일어설 힘이 있다면, 분명히 천천히 걸을 수도 뛸 수도 있으니 나보다는 먼저 도착할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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