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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믿는 나는 진짜 나인가?

예술은 사과의 맛이 난다 EP.9_ '하찮은'그림을 그러야 하는 이유

by 장지혁

1. 말랑한 사고관은 가치 있는 예술을 만들어낸다.


친척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좀 불편해.

: 왜?

: 모든 걸 경험해보지 못했을 텐데,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아.
너무 딱딱해. 그래서 나는 말랑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편하고 좋은 것 같아...

: 그러게... 말랑한 사고관은 뭘까?

: 음... 어떤 세계관에 들어가 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들 말이야. 누군가 말할 때, 그 의견을 충분히 받아들이려는 태도.

: 그런데 생각이 완전히 없어도 말랑하잖아.

: 그러면 말랑한 사고관이 별로 안 좋은 건가? 줏대도 없는 것 같고.

: 내 생각에는 한 번 딱딱해졌다가 다시 말랑해지는 것이 진짜 성숙한 거 같아.

: 그것도 맞는 말 같다. 한번 딱딱해진 생각이 깨지면, 자신이 다시 딱딱해질 때를 경계할 테고, 말랑해졌다는 것이 뭔지도 알고 있을 테니까 더 성숙하게 사람과의 대화를 듣고 고민할 수 있겠다.


이 대화를 통해 나는 머릿속에서만 부유하던 ‘말랑한 사고관’의 개념을 정리했다. 이는 단순히 줏대 없이 흐느적거리는 사고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가지면서도 타인의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듣고 고민하는 태도이다. 말랑한 사고관은 고정된 틀에 갇히지 않으려는 유연함이며, 본인의 신념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의견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태도가 예술에서 중요한가?

나는 그렇다 생각한다. 예술은 정답이 없는 영역이며, 예술을 통해서 기존의 틀이 아닌 새로운 시각과 표현도 고민하고 공감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그 기능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토머스 존스(Thomas Jones, 1742-1803)"를 들 수 있다. 존스는 18세기 영국 화가로, 그가 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회화의 위계에 도전한 인물이었다. 당시에는 역사화나 초상화가 주류였고, 풍속화를 그린 그림은 회화의 가장 낮은 단계로 여겨졌다. 그러나 존스는 로마의 평범한 벽과 창문을 정밀하게 묘사한 풍속화를 거대한 종이에 남겼고, 이는 회화의 위계를 허물었다. 그의 작업으로 인상주의와 평면주의로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예술계의 기준에서 보면 ‘하찮은’ 그림이었지만, 그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보았고, 공감했다. 그런 사고로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창작을 만들어내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냈다.


고로, 말랑한 사고관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생각과 말을 깊이 있게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해보려 하고, 고민할 수 있다. 이해해 보려는 시도들은 고민을 만들고, 이 고민이 모여 질문을 만든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대답해 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생각과 표현의 욕구가 적절하게 표출될 때, 그 표현은 입체적인 예술이 된다. 깊이 있는 고민과 질문을 함유하고 있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2. 말랑한 사고관이 예술로 이어지는 과정


세상의 모든 질문은 결국 본질적으로 “그게 뭐야?”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사과가 떨어지게 하는 힘은 뭐야?”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이 중력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살바도르 달리 역시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탐구하며 “무의식이 뭐야?”라는 질문을 품었고, 이는 초현실주의 미술을 탄생시켰다. 결국 말랑하게 들어온 타인의 생각이 자신에게 소화될 때, 그게 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의 끝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탐구하는 과정과 연결된다. 타인의 말을 깊이 들을 수 있다면,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타인의 말로 나를 다시 두드려보고, 보완하고, 깨 보는 것이다. 그래서 딱딱한 무언가가 깨질 때는 끝이 아니라, 성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맞겠지. 기존의 생각이 흔들리면서 우리는 더 깊이 고민하게 되고, 그러한 고민이 예술로 연결된다. 예술은 단순히 형태나 색을 넘어서,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고 이해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 예술을 창작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이 마침내 나의 작품으로 형상화된다.


특히, 예술은 창작자의 고민이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이 될 때, 그 가치를 발한다.

예를 들어, 마르셀 뒤샹의 '샘'을 보자. 평범한 기성품인 소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하며 “이것도 예술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작품이 던진 질문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 예술이 무엇이며,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탐구였다. 이를 받은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각자만의 의견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현대 미술이 시작되었다. 결국, 뒤샹의 물음은 보는 사람에게 전달이 되었고, 현대 미술의 개념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예술은 단순히 창작자의 표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 타인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생각할 기회를 줄 때 가치 있는지가 결정이 된다. 그렇기에, 한 작품을 마주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너는 과연 진짜 너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그 예술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공간이 된다. 예술은 질문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확장하고, 인간과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결국, 예술은 단순히 형태나 색이 아니라, 질문과 사유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한 개인은 정보를 모두 받아들이고 완벽한 사유를 당연히 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나의 정보로 만든 인사이트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한다면 사고가 딱딱해지고, 이는 일시적인 맹목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말랑한 사고관’은 더 큰 세상을 이해하고 예술을 확장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말랑한 사고를 가진 사람만이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만이 예술의 가치를 확장할 수 있다.


예술이 사람의 공감을 확대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 조지 엘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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