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날의 초상
필자는 경상남도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국민학교는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중학교는 우리집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걸어서 1분내 교실에 도착이 가능했다. 그래도 중학교때 심심찮게 지각을 한 적이 있다.
중.고등학교가 우리집과 붙어 있었는데, 그 학교들은 외할아버지께서 교육발전을 위해 교육청에 학교 부지를 무상 기부하셨다고 한다. 학교 부지를 기부하기 전에는 지금의 학교 운동장 가운데 우리집이 있었다.
새로 지어 옮긴 우리집은 학교 후문쪽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방구 겸 잡화를 파는 가게를 운영했다. 그런데 집에서 1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는 상업계 고등학교라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목표로 한 나는 울산으로 통학이 불가피했다.
평소에도 버스만 타면 버스의 기름냄새와 버스의 흔들림으로 인해 나는 차멀미가 심했다. 그래서 왠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버스로 1시간 거리인 울산의 고등학교를 걸어서 다니기는 불가능했다.
고교 입학 첫날, 아침부터 버스시간 맞추랴, 차멀미 걱정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는 수업을 마치고도 밤 10시까지 야간 자습을 했다.
매일 아침 어머니께서 연탄불에 도시락을 10여개를 싸서 7남매에게 1-2개씩 나눠주셨다. 나는 야간자습으로 인해 뜨거운 도시락 2개, 반찬통, 물통을 책가방에 쑤셔 넣었다. 요즘처럼 배낭형 가방이 아니라 손에 드는 학생용 가방이라 가방 속이 보기 보다 좁았다. 책과 도시락 등을 모두 넣고 나면 가방이 잘 잠기지 않을 정도로 빵빵해졌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집에서 걸어서 신작로가 있는 버스정류장까지 20여분을 걷다가 뛰다가 도착했다. 아침에 한대 밖에 없는 버스는 우리집보다 더 깊은 산골 마을 학생들을 이미 가득 태운 채 정류장에 도착했다. 매일 아침 이미 만차 상태인 버스에 올라 타는 것이 나에게는 하루일과중 가장 심각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 당시는 버스 안내양이 있었다. 버스 안내양은 버스문 밖에 매달리다 시피한 아찔한 상태에서 버스 안내양이 '오라이'를 외치면서 동전으로 버스 문짝을 2-3번 내리치면 버스는 힘겹게 출발했다.
울산까지 가는 도중에도 마을마다 정차하여 또 다시 학생들을 태웠다. 버스 운전사는 커브길에 일부러 핸들어 이리저리 돌려서 버스 입구쪽에 있는 사람들을 안쪽으로 강제로 이동시켰다. 그래야 마을마다 있는 정류장에서 학생을 더 태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본래 차멀미가 심한 나는 학교에 도착하자 마자 초주검이 됐다. 오전 수업은 피로와 멀리로 인해 비몽사몽 가사상태로 보냈다. 어머니께서 정성드려 싸주신 점심 도시락과 교내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먹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저녁 자습이 끝나갈 무렵에는 학교 운동장 가득히 시내버스가 들어왔다. 당시 우리학교는 신설된 울산시 최초의 공립 인문계 고등학교라서 울산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밤 10시가 넘어서 하교 하기가 어려웠기에 버스회사와 협조해서 학교 운동장까지 버스가 들어왔던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버스회사가 협조해 준 이유는 우리학교 학부모가 버스회사 간부였다고 한다. 그러나 울산시외 시골에 사는 나는 그 버스를 이용할 수 없었다.
시골에서 유학온 시골친구들과 나는 운동장의 시내버스를 타지 못하고 학교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면 밤 11시가 넘었다. 당시는 토요일도 학교가서 오전 수업을 했다. 1주일이 정말 정신없고, 몸도 무척 힘들었다. 시골에서 걸어서 10-20분 거리에 있던 학교를 다녔던 나로서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와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어떤 때는 밤 늦은 설겆이를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가끔씩은 새벽 4시부터 일어나서 연탄불 갈고, 하루종일 장사하느라 녹초가 되어 졸고 있는 어머니의 곤한 모습을 볼 때가 있었다. 그럴때는 조용히 나는 설겆이를 했다. 산더미 같은 설겆이를 다하고 나면 새벽 1시쯤 되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어머니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덜어 드린다는 생각에 마음만은 편했다.
중학교 다닐때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고교 진학후에는 통학시간과 피로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1학년은 장거리 통학에 적응하는데 다 보낸 것 같다.
당시 우리학교에는 야자를 마칠때면 자가용들이 더러 학교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울산시내 유명 치과를 운영하고 있다는 친구, 아버지가 사업을 하는 친구 등이 그 자가용을 타고 다녔다.
어린 마음에 부럽긴 했다. 그렇다고 시골출신 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부모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면 되니까"하는 자신감이 충만한 때 였으니까 크게 부럽지 않았다.
고교시절 통학을 하면서 "인간이 태어나서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야 하는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시절의 고생과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랑스런 내가 있지 않겠나?"는 생각이 든다.
힘들고, 마음 아플때도 있었지만, 다 지나보면 추억이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었던 내 젊은날의 초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