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러 가는 사이...
메뉴를 정하고 마트로 향했다. 기억을 잃은 나에게 운전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과거 운송업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지갑 속의 운전면허증과 함께 남아있었지만, 핸들을 잡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가까운 마트를 찾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지갑에서 발견한 교통카드는 다행히 유효기간이 충분했다. 지갑, 휴대폰, 그리고 낡은 쇼핑백을 챙겨 집을 나섰다. 과거의 일기를 통해 현지와 나의 사진을 매일 새 액자에 넣기 위해 들르던 사진관을 제외하면, 이곳이 가장 먼 외출이었다.
집 밖으로 나서자 햇살이 눈이 부실 정도로 쏟아졌다. 하긴, 오늘의 나는 처음으로 바깥세상을 마주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현지 아버님, 오늘도 사진 인쇄하러 가시나요?"라는 낯익은 듯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30대 후반에서 40대로 보이는 여성이 다가와 내 옆에 섰다.
"아… 오늘은 장 볼 게 있어서요. 장도 보고 인쇄도 하고, 겸사겸사 나왔습니다."
"아, 하긴 장 볼 때가 되셨겠네요."
그녀의 말을 듣자 과거의 나도 종종 장을 보러 다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냉장고의 식재료가 저절로 채워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쉴 새 없이 말을 건넸다. "오늘은 어떤 거 사 오시려고요?", "최근에 현지 봤는데 키도 크고 엄청 예뻐졌더라고요.", "요즘 날씨가 덥죠?", "저 요즘 수영 시작했는데 처음이라 엄청 어렵더라고요." 짧은 엘리베이터 대기 시간과 내려가는 순간 동안 나눈 대화는 마치 두 시간 동안 이어진 것 같은 피로를 안겨주었다. 솔직히 이대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도 알찬 하루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어린 시절의 현지를 알고 있는 오랜 이웃인 듯했다. 나중에 은근슬쩍 현지에 대해 물어볼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가급적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여전히 밝은 햇살은 뜨거운 열기가 되어 기다리는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 50대쯤 되어 보이는 한 여성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인사라 생각했지만, "현지 아빠!"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나를 향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교통카드를 찍으며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나는 당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내듯 뒷자리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신호를 '불편한 자리니 제 옆으로 오세요'로 해석했는지, 나를 따라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젠장, 내가 가야 할 정류장은 열두 정거장이나 더 남아있는데 제발 다음 역에서라도 내려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여성이 그랬던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걸어왔다. "현지는 요즘 잘 지내요?", "무슨 일로 외출하시나요?", "요즘 날씨가 참 덥죠?" 엘리베이터 여성과 거의 똑같은 질문이 이어지던 중, 그녀의 질문은 더 민감한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요즘 현지 엄마를 잘 못 봤는데, 잘 지내시죠?" 그녀에게는 단순한 안부였겠지만, 순간적으로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몰려왔다.
"이혼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신경질적인 내 한마디에 시끌벅적하던 버스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버스 여성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급히 버스 벨을 누르고 서둘러 내려버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나를 반겼다. 마트까지는 꽤 거리가 남아있었다. 여섯 정거장이나 일찍 내려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정류장을 벗어나 마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어렵네.'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