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얄밉다

by 희봄

수십 분째 작은 수첩을 접었다 폈다,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먹고 앉았는데, 한 시간째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 채 망설임만 길어졌다. 얼마 전 그림 수업에서 강사님은 영화 장면을 보고 10장 이상을 그려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대단한 솜씨가 아니라서 이런 말을 하기도 민망하지만, 알 수 없는 게으름이 손끝을 붙잡아 모든 의욕을 집어삼켰다. 마음이 공중 부양하듯 떠다니니, 이걸 붙잡으려면 주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녀를 그리고 싶어졌다. 곧바로 사진 한 장을 보내달라며 그녀에게 전화했다.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며 천천히 보내도 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말과 달리 그녀는 간병 일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달려가, 몇 장 안 되는 사진을 정성스레, 그리고 아주 빨리 찍어 보내주었다.


카톡, 카톡.


알림이 울릴 때마다 젊은 시절 그녀의 모습이 한 장씩 도착했다. 제일 먼저 만난 건 교복을 입고 논밭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흑백이라 흐릿했지만, 얼굴에는 앳된 기운이 가득했다. 그다음 사진은 한 소녀가 벚꽃 옆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뽀얀 피부, 반달눈, 통통한 볼살. 꽃보다 더 예쁜, 찬란한 계절의 한복판에 서 있는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실제로 만났다면 “정말 귀엽네.” 하고 먼저 말을 걸었을지도 모를 만큼 풋풋했다. 그녀의 싱그러운 모습은 되레 낯설게 다가왔다. 나보다 훨씬 어린 소녀로 마주한 그녀의 존재가 묘하고 먹먹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사진 속 해맑은 소녀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다.


네 꿈이 뭐니? 넌 뭘 좋아하니?


고루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지만, 어른으로서 그녀의 미래를 응원해 줘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책임감이 생겼다. 사진 속의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곧 맞닥뜨릴 시간이 얼마나 길고 외로울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해말 간 자신을 지우고 견뎌내야 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럼에도 인내하고 웃어야 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소녀를 힘들게 할지 나는 잘 알고 있기에,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아, 너무도 슬픈 조우다. 밝은 미래를 기대하는 듯한 낭랑한 소녀의 볼살 앞에서, 반성문이라도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꽃 옆에 서 있는 소녀의 사진을 지고한 마음으로 스케치했다. 물감을 칠할지 색연필을 잡을지 몇 번을 고민하다가, 결국 색연필로 테두리를 그리고 벚꽃 잎은 작은 점으로 찍어 눌렀다. 특히 그녀가 입고 있는 자주색 바바리코트와 어깨에 힘이 들어간 흰 남방을 정성껏 살리고 싶었다. 70년대 시골에서도 이렇게 화려한 옷이 있었나 보다. 브랜드도 없던 시절, 잡화점에서 직접 맞춰 입었다는 귀한 옷. 큰마음먹고 마련했을 그 옷을 입고 설레하며 카메라 앞에 섰을 그녀를 떠올리니 마냥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녀 옆에서 제 모양을 뽐내는 벚꽃이 돌연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분홍 속살을 드러내며 활짝 핀 꽃잎마저 얄미워 보였다. 꽃은 매년 같은 분홍으로 돌아오는데, 그녀의 분홍은 어디로 흩어져 버린 걸까. 매년 피고 지는 꽃이 뭐라고, 늙을 줄도 모르고 다시 돌아오는가. 그녀만 세월을 통째로 건너와 저 말간 미소를 잃어버렸다. 목에 이물감이 차오르듯 괜스레 서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너만 할 때는 안 그랬는데…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녀는 막 마흔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만홧가게에 오던 젊은 이모들은 종종 그녀의 외모를 칭찬하곤 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사장님, 피부가 너무 좋아요.

누가 사장님을 40대로 보겠어요~


그런 인사치레 같은 말 한마디에도 그녀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발그레해진 볼을 보며 기분 좋아하던 그녀를, 나는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 빤히 바라보곤 했다. 이제 나 또한 노화를 피할 수 없는 나이가 되고 보니, 칭찬 한마디에 소녀처럼 좋아하던 그녀의 마음이 절실히 이해된다. 그녀도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였다. 그러니 찰나의 어제를 붙잡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문득 젊은 시절의 그녀는 정말 행복했을지 궁금해진다. 내 기억 속에는 그녀의 환한 웃음보다 고단함이 더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다시 벚꽃처럼 활짝 피어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생에 가장 눈부셨던 그 계절을 기억하며 웃음 지을 수 있는 마음은 남아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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