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우는데 서명한 사람

사랑이라 쓰고 계약이라 읽는다.

by ClaireH


그동안 나의 모든 문서 일들은

남편이 도맡아 처리했다.

성격이 꼼꼼했고,

늘 먼저 알아보고 앞장서는 스타일이라

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잘하니까 , 나서는 게 오히려 실수일 거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사무적인 일은 그의 몫이 됐다.

심지어 내 비자 서류까지도,

전문가 도움 없이 우리 둘이서

꼼꼼히 준비해 냈을 정도였다.

나는 믿고 맡겼다.


첫째가 태어난 후,

남편은 출생신고며 정부 보조금 신청으로 바빠 보였다.

시간이 꽤 흐른 후에야, 나는 알게 됐다.

그것도 남의 말을 통해서.


“보조금은 보통 산모한테 주지 않아?”


보통이라는 말이 자존감을

무너트릴 수도 있는 날카로운 말이었나.

아, 나는 그 ‘보통’의 범주에 속하지도 않는 사람이구나. 그날 처음, 내 낯짝이 부끄러웠다.


그에게 물었다.


“그 보조금은 어디 있어? 꽤 되는 걸로 아는데?”


“생활비로 다 썼지.”


그래… 생활비. 많이 들지.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싶었다.

장모님도 모시고 사는 집에서

생활비 이야기를 꺼내는 건 금기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힘든데,

그냥 알아서 아껴 쓰라는 말처럼 들렸다.

말을 하지 않아도, 눈치껏 그렇게 되는 거였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물으면,

꼭 뒤따라 나온다.


“생활비가 얼마나 드는 줄 알아?

이번 달도 많이 나갈 거야.”

그러곤 나한테 신용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생활비 ! 한도는 200만 원이야.

현금 인출은 하지 마. 수수료 많이 나가니까.

정 필요하면 말하고.”


그 신용카드는 매달 가계부처럼 정산을 받아야 했다.

그의 게임용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아

지출 내역을 하나하나 설명해야 했다.

어디서, 왜 썼는지.

지겨웠다.

그보다 더, 자존심이 무너졌다.

매달 마지막 날은, 나의 숙제 검사 날이었다.


어느 날 물어봤다.


“현금이 필요할 땐 왜 꼭 너한테 말해야 해?”


“우리 엄마가 그랬어.

현금 주면 무슨 일에 쓸지 모른다고.”


그때 처음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개자식.’


또 나를 이렇게 무너뜨리는구나.

계약서, 돈, 문서… 결국엔 다 돈이었구나.

너는, 내가 돈을 가져갈까 봐 겁나는 거였구나.


이런 게 ‘정이 떨어진다’는 건가.

사람 사이에, 하다못해 떠돌이 개에게도 정이 가는데

이건 뭐, 개만도 못했다.


그렇게 상처 하나를 품고 1년을 살았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둘째 임신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소식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임신이었고,

이미 아기 하나를 돌보며 지쳐 있던 내게

이건 또 다른 스토리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둘째는 너무 빨리 세상에 나왔다.


아이는 990g의 작은 몸으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7개월 만에 태어난 아기.

의사들이 모여 회의를 할 정도로,

병원이 발칵 뒤집어졌다.


다행히 아이도 나도 크게 문제가 생기진 않았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돌볼 틈도 없이 병원을 오가다 보니, 온몸이 아파왔다.


그런데, 남편은… 첫째 때와 다르지 않았다.

급박하게 아이를 낳고

정신을 잃듯 쓰러진 내 옆에서,

피가 흐르던 나는 중요치 않고

그저 아이만 바라보던 그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래… 아기가 먼저일 수 있지.

그래도 “수고했다”, “괜찮아?”

그 말 한마디가 없었던 첫애때와 똑같았다.

바뀌었을 거란 기대를 한 내가 바보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퇴원할 즈음

엄마 비자에 문제가 생겼다.

잠시 한국에 다녀와야 한다는 결론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나도 엄마 따라갈래.

나 혼자는…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아.”


그 사람이 보기 싫었다.

아기 둘을 그 사람과 단둘이?

엄마 없이?

절대 못 하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기저귀 하나 갈아 달라해도 헛구역질에,

청소도 , 요리도 , 라면밖에 못 끓이는 그 사람과

끝이 안 보이는 시간을 함께하라니.


나는 못 했다.

아니, 안 했다.

도망치듯 그렇게

갓난아기, 두 살배기 딸, 엄마, 그리고 나.

넷이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결혼은

그때부터 이미 끝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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