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더 이상 참고 살지 않기로 했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
한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그 말의 뜻을 알게 됐다.
진짜 자유.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도 눈에 들어오는 여유.
밥 한 끼가 이렇게 맛있었나 싶을 정도로,
작은 오피스텔 안에서의 삶이 내겐 완전한 행복이었다.
아이 둘, 어른 셋이 옹기종기 살았지만
넓은 집에 살던 시절보다 더 웃고, 더 나눴다.
한의원도 다니며 건강을 돌볼 수 있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있을 때, 남편은 말했다.
생활비가 빠듯하다며 돈을 더 보내지 못한다고.
그땐 몰랐다.
사실은 나 몰래,
다른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었단 걸.
디포짓이 필요했던 거다.
그런데 왜 그땐 그렇게 죽는소리를 냈던 걸까.
나중에 알았다.
그가 받는 연봉을.
도저히 돈이 없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걸.
그러더니 어느 날,
엄마의 비자가 나오기 전까지만
시어머니 댁에서 지내라고 했다.
미얀마였다.
낯설진 않았다. 매년 방문하던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남편 없이 시댁에서 지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세 달의 자유를 뒤로 하고
나는 다시 미얀마로 향했다.
시누이 둘도 와 있었고,
아이 셋이 모인 그 집은 말 그대로 바글바글했다.
문제는 곧 시작됐다.
둘째 시누의 아이가,
우리 큰아이를 자꾸 때리려 들었다.
내가 옆에 있음에도.
말려도 통하지 않았다.
심술인지, 질투인지.
분명 그 아이는 모든 이쁨을 독차지하던 아이였다.
그래서 최대한 우리 아이 곁을 지키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아침.
각자 분주한 집안.
누군 티브이를 보고, 누군 식사를 하고.
아기들은 도우미들이 돌보고 있었다.
엄마가 아이들을 보러 잠깐 나간 사이,
크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무슨 일이야?!”
“사촌 애가 자물쇠로 아현이 이마를 찍었어.
이마 한 번 봐봐라. 상처 안 났니?”
심장이 얼어붙었다.
아이는 이마를 감싸 쥐고
엄마 품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피는 많이 나지 않았지만, 깊게 파였고
곧 멍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 진정시켰고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저 순간의 장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손을 드는 행동은,
그게 누구든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다음이었다.
둘째 시누는 아무 말 없이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 아이의 안부도 묻지 않은 채.
엄마로서, 한 사람으로서
그 무책임함에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아현아, 그 아이랑은 가까이하지 말자.”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날 저녁.
나와 아현이는 문을 열자
거실에 시어머니, 둘째 시누, 그 아이가 앉아 있었다.
나는 문을 다시 닫고 들어왔다.
그리고 조용히 다시 나와 주방으로 향하던 순간,
시누가 나를 불렀다.
“무슨 문제 있어?”
그 한마디가
내 안에 눌러왔던 모든 걸 폭발시켰다.
나는 참지 않았다.
터뜨렸다.
엄마라면 자식 행동을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상처받은 아이 앞에서 사과 한마디 없냐고.
그녀는 듣기 싫었겠지.
결국 날 향해 머리채를 잡으려 들었고,
몸싸움이 시작되려던 순간
집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때, 엄마의 외침이 울렸다.
“임산부야!!”
그제야 모두가 멈췄다.
엉망이었다.
그 밤은 내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어도, 내 편도, 위치도 없었다.
나는 그냥 거기에 ‘있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단 한 마디.
“거기서 알아서 해결해. 지금 몇 신 줄 알아?”
“… 뭐라고? 지금 그게 나한테 할 말이야?”
내 딸들이, 와이프가, 장모가 그런 취급을 받았는데
관심도 없었다.
상황이 어떤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전화 끊고 자겠다는 말뿐.
나는 울었다.
그제야 알았다.
“괜찮아?”
그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는 걸.
그날 다짐했다.
아이를 어른들 싸움에 떨게 하지 않겠다고.
그런 몰상식한 환경 속에 더는 살게 하지 않겠다고.
나는 이 결혼을 끝내야겠다고.
“이혼하자.”
“그까짓 거, 사인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