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겹쳐 운명이 되던 날
제조업체에서 일하던 시절, 나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병원을 찾아야 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검사와 긴 대기 시간은 늘 지겹게만 느껴졌다. 손이 굳어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 때면 놀랄 만큼 아팠고, 몸은 점점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결국 이석증에 이어 혈소판 수치가 급격히 떨어져 ‘혈소판 감소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 병명을 알기까지 무려 6개월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뽑아낸 피의 양은 상상 이상이었고, 양팔에는 주사 자국과 멍이 지워지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전구가 희미하게 꺼져가는 것처럼. 코로나마저 버텨낸 나였지만, 정작 내 몸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은 낯설고 아팠다. 그러나 그럼에도 속으로는 “이 시기도 언젠가 지나가리라”는 작은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낮에는 제조업체에서, 밤에는 대리기사로 뛰어야 했다. 저녁은 늘 유동식으로 간단히 넘겼다. 속은 자주 체했고, 소화불량은 나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결국 몸이 버티지 못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대리 일을 내려놓았다. 면역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나는 작은 실천을 시작했다. 매일 일 끝나고 한 시간씩 걷는 것. 천천히라도 몸을 다시 세우고 싶었다.
그 무렵, 사장님이 다가와 제안해 주셨다.
“우리 물건을 팔아봐. 급한 생계는 그걸로 채워.”
그 한마디는 마치 숨통을 틔워주는 말 같았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방법이라 생각했고,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한국으로도 물건을 보내며 좋은 반응을 얻었고, 잠시나마 생활에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회사 시스템에는 의문이 쌓여갔다. ‘이곳에서 더 나아가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선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이웃이라며? 어디 살아? 반상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반가운 사람이었다. 스무 살,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그때의 사수, 바로 ‘쌤’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내가 사는 동네 옆동에 살고 있었다. 늘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을 인사처럼 달고 살던, 따뜻한 스승 같은 사람이었다.
그와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게 된 사연부터, 요즘 겪고 있는 직원들과의 갈등까지. 그는 다시 함께 일해보자고 권했지만, 지금의 급여를 맞추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 손에 뻥튀기 한 봉지를 쥐어주며 말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
그 짧은 한마디는 잔소리 같으면서도 위로였다. 누군가 밥을 걱정해 준다는 건,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거라 했는데… 그날 이후 뻥튀기 봉지 하나가 오래도록 나를 따뜻하게 했다.
시간이 흐르며 코로나 때 늘었던 체중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걷기는 여전히 나의 일상에 남았고, 몸과 마음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물론 저녁 술자리가 습관처럼 이어지곤 했지만, 예전처럼 무너지지는 않았다. 회사 근처에서 쌤을 자주 마주치기도 했다. 지인의 가게에 물건을 납품하던 그와 일주일에 한 번쯤은 우연히 스쳤다.
“오랜만이에요! 와, 살 많이 빠지셨네요.”
“네가 살쪘다고 해서 뺐지.”
“하하, 보기 좋아요. 정말 많이 빼셨어요.”
“밥 한번 먹어야지.”
“네, 연락 주세요.”
그렇게 몇 번이고 미뤄졌던 약속. 그리고 드디어, 2년 만에 약속이 잡혔다. 병원 예약보다도, 치과 예약보다도 더 잡기 어려웠던 한 끼 식사 약속. 그 약속을 향해 가는 길 위에서 나는 건강을 조금 되찾았고, 마음은 한층 더 단단해져 있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두 번째 이혼을 통해서 배우며 삶을 살아가는
저희 이십 대부터 삼십 대 중반의 삶을 글로 옮겨봤습니다.
서럽고 치열했지만 그 속에서 또 성장한 것 같습니다.
힘들지만 이겨낼 수 있고 고통스럽지만 제 자신을 원망하지 않으며 지냈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이것 또한 추억이 되겠지라는 스스로의 희망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지막까지 놓치지 마세요.
그 끝엔 행복이 옵니다.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음 연재글은 사랑 가득한 러브 스토리로 돌아오겠습니다.
당신의 삶에도 오늘의 기록이 작은 울림으로 닿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