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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립 Feb 21. 2022

술 먹고는 글을 안 쓰기로 했는데 말이지

혼자, 둘이 사는 이야기 1

내 플래너에는 항상 '오늘의 할 일'이 주루룩 쓰여 있다. 공부를 하던 시절에도 그랬고, 회사에서 업무를 보던 때에도, 그리고 이제 집에서 혼자 이것저것 준비하고 공부를 하면서도 그렇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절반도 빨간 줄이 그어지지 않은 전날의 할 일을 오늘의 할 일로 적어넣는 게 매일 아침의 루틴이었다.


단 한 번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으니, 더 늦기 전에 날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며 퇴사를 했는데, 여전히 나의 플래너는 빨간 줄은 없이 까만 글씨만 가득하다. 어젯밤 자려고 누운 채로 갑자기 '안 되겠다, 나를 되돌아보고, 더 중요하게는 빨간 줄을 추가할 겸, 일주일에 한 번은 무슨 글이든 써야겠다! 의지를 다지기에는 역시 월요일 오전이 최고지!' 라는 생각을 했다. 역시 번뜩이는 아이디어라며 뿌듯해하며 잠에 들었던 것 같은데, 눈을 떠 보니 평소처럼 내 알람은 나도 모르게 꺼진지 몇 시간이 지나 있었다. 오늘도, 어쩌면 이번 주도, 또 어쩌면 이번 달도 글러먹었구나, 하며 하루를 뒹굴거렸다. 


저녁에 있던 약속이 눈으로 취소되고, 조슈아는 야근을 한다는 연락이 와, 혼자 야끼소바를 해먹다가 짠 맛에 질려 집에 한 캔이 남아있던 맥주를 땄다. 역시 혼술이 금방 취한다고, 맥주 오백에도 알딸딸한 느낌이 든다. 담배를 끊기로 하고 어제 남은 담배를 다 피워버렸는데, 술이 들어가니 니코틴의 유혹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젯밤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거의 24시간을 참아냈으니 하루에 한 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라는 벌써부터 금연 실패의 냄새가 솔솔 나는 마음으로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다가 피우고 들어왔다. (조슈아도 함께 끊기로 해서 오늘 아마 하루 종일 참았을텐데, 조슈아는 내 글을 안 보니 솔직하게 쓸 거다.) 가벼운 삐가리와 함께 이미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했으니 잠들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게으른 마음이 또 든다. 그러다가 문득 워드 파일을 열어본 것은 내가 글을 거의 쓰지 않으면서도 나를 위해 지키고 있는 어떤 규칙을 깨고 싶은 반항적인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


'술 먹고는 글을 쓰지 말자.'


사실 가장 이것저것 글을 싸지르고 싶은 순간은 멀쩡한 상태도 술에 잔뜩 취한 때도 아닌, 아주 살짝 알딸딸한 자정 혹은 새벽이다. 그것도 뭔가 아슬아슬한 노래를 듣거나, 몇 번이고 다시 본 영화나 드라마를 또 돌려 보며 혼자 술을 마시고 갑자기 정적이 찾아온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고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은 그 상태에서 쓴 글들이 항상 온갖 감성와 우울로 가득찬, 결국 술을 더 마시고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깨어나 다시 읽으면 소름이 오돌토돌 돋아버리는 중2병스러운 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을 다시 보며 저녁을 먹고 술을 먹다가, 밴드 'O.O.O'의 노래를 들으며 설거지를 했는데, 수도꼭지를 잠근 순간 노래 한 곡이 끝나 아주 짧은 침묵이 부엌을 채웠다. 그 침묵의 순간, '아, 오늘은 글을 써야지.'라고 일탈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의 아무도 보지 않을 글이지만, 브런치라는 공개적인 공간에 싸지른 글인만큼 나는 오늘의 반항을 내일 아침 후회하면서도 지우지 않을 다짐을 하는 것이다. 이걸 일기라고 해야 할지, 에세이라고 해야 할지 (사실 나는 두 개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한 쪽씩 뭔가를 쓰고 그 다음 날 또 반성하고 또 술을 마시고 또 배설하듯이 글을 쓰면 어느 순간에는 조금이라도 나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또 기약 없는 기대를 가져본다. 이 두서없는 주절거림을 어쩌다 보게 되신 분들께 심심한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전하며 다음주 월요일은 조금 더 일찍 일어나겠다는 계획도 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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