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독립 Mar 28. 2022

A.R(After Resignation) 1년 -2

혼자, 둘이 사는 이야기 6

꿈 1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게으름 하나 부리지 않고 출근을 준비했다. 이제 딱 나가기만 하면 될 상태에서 시계를 보니 보통 같았으면 이제 막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질질 기어나왔을 시간이다. 뿌듯함에 활짝 웃으며 조슈아에게 다녀오겠노라 인사를 했다. 그 때 조슈아가 자신도 곧 출근할 테니 데려다 주겠다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외투를 꺼내 오려나, 싶어 거실에 앉아 핸드폰을 쳐다보며 기다리는데 한참이 지나도 조슈아가 나오지 않는다. 편안한 마음으로 웹툰을 보던 것도 잠시, 어느새 시간은 평소에 출근하던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 때 아빠가 등장한다. 아빠도 나갈 일이 있으니 데려다주겠다며 기다리라고 한다. 잠깐 망설이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가득할 지 모르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모르는 타인의 뒤통수에 붙어 흰머리를 세거나 땀냄새를 맡는 것보다는 편안히 조수석에 앉아 가는 게 분명 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이제 택시를 타야 겨우 회사에 정시 출근을 할 것 같은 시간이 되도록 아빠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엄마가 뿅 나타나더니 역시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지금 시간이면 그냥 택시를 타는 게 나을 것 같다며 집을 나서려는데 엄마가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기다리라고 소리를 질러 당황스러운 마음에 다시 제자리에 섰다. 결국 시간은 9시가 되어 버리고, 엄마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제서야 급하게 택시를 잡아 탔다. 어디로 가시냐는 기사님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꿈 2


태블릿PC를 통해 화상회의에 접속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팀장은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렸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했다가는 삽시간에 내가 물어뜯길 것을 알고 있기에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깐다. 그런데 팀장의 의식은 점점 산으로 가고 가끔이나마 입을 열어 대답하던 팀원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만은 없는 헛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건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은데요." 라고 중얼거려 버린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팀장이 나에게 질문 세례를 퍼붓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내가 담당해서 치워버려야겠다는 마음으로 화상회의 시스템의 메시지 기능을 이용해 답변을 적었다.


그런데... 키보드가 고장난 건지 메시지 창에 'ㅗ' 외에는 다른 글씨가 써지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막 나가고 팀장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언행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유명했더라도, 이건 인간 된 도리가 아니라는 당황스러움에 서둘러 노트북을 열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리고 전원 버튼을 몇 번씩 다시 눌러도 부팅이 되지 않는다. 태블릿PC를 보니 어느새 내가 전송하지도 않은 'ㅗ'가 내 이름으로 메시지창을 도배하고 있고, 사라졌던 팀원들도 돌아와 컴퓨터 화면 속의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팀장이 나를 비난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나는 내가 이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호한 목소리로 "저 퇴사했잖아요. 저 이직한 회사로 출근할 거예요." 라고 당당히 내뱉고는 화상회의를 나와 버렸다. 그리고 새 회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무슨 생각으로 내가 아직도 출근하지 않았는지, 어이가 없어 나를 탓하며 얼른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 회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하는 회사였는지, 심지어는 회사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커다란 도로 한복판에서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세상이 빙빙 도는 듯한 느낌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다가 깨닫는다. 


나는 이직을 하지 않았고,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로 지금 이 길거리를 떠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잠에서 깼다.




현실


회사를 그만 둔 지 반 년이 거의 다 되었다. 


퇴직 면담을 하며 왜 그만 두냐는 팀장의 물음에 차마 "팀장님이 너무 xx 같아서 제 몸과 마음이 썩어버렸거든요~ 우선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회사 업무와는 큰 관련이 없는 전공의 석사 학위가 있었고, 일을 하다 보니 전공에 미련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아 박사를 가려고 한다고 둘러댔다. 정해진 학교가 있냐는 질문에는 잠시 망설이다가, 더 큰 거짓말은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우선 혼자 공부하며 세부 전공과 연구실을 정하고 내년에 원서를 넣을 거라고 대답했다. 팀원들의 질문에도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악의없이 "그냥 놀겠다는 거네~ 그래, 좀 쉬어." 라며 웃었다.


당시 회사는 갑작스럽게 급성장을 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단계였고, 내가 속해 있던 HR팀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퇴직 신청을 했다. 그들의 퇴직 사유가 뭐가 됐건 인력을 관리해야 하는 우리 팀은 물론, 회사 전체가 눈코뜰새 없이 들썩이는 때였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근속이 오래 된 직원들이 일거리를 떠넘기고 도망간다며 눈을 흘겼고, 오랜 시간 이 회사에서 근무했지만 퇴사를 결심하지 않은 (혹은 못 한) 사람들은 이 구렁텅이에 그들만 남기고 떠난다고 서운해했다. 우리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출근일에 회사를 돌며 인사를 할 때도 퇴직 사유를 묻는 이들에게 모두 똑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결혼하자마자 대책 없이 회사를 때려쳐 버린 둘째 딸을 걱정하는 엄마에게도 역시 여러 번 박사 이야기를 했다.




거짓말만 배운 앵무새가 되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퇴사 후 어정쩡한 관계의 회사 사람들과 연락을 하게 되면 "공부는 어떻게 되어 가냐, 전공이나 학교는 정했냐"는 질문이 당연한 듯 따라왔다. 진정한 퇴직 사유를 아는 선배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우리 팀원들한테는 그냥 나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해 줘요."라는 신신당부가 작별인사였다. 엄마는 나와 통화를 할 때마다 언제까지 놀 거냐고, 3월에는 입학하는 거냐며 닦달했다. 그런 날이면 '나 진짜 이렇게 노느니 교수님한테 연락하는 게 나은 건가?' 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렇다고 마냥 놀고만 있을 수는 없는 성격 탓에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이 함께 차올랐다. 2~3개월이 지났을 무렵, 조슈아와 함께 창업을 하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큰 그림부터 구상하기 시작했다. 혼자 책상에 앉아 머릿속으로 "이거 아이디어 괜찮은 것 같은데? 이러다가 나 대박 나는 거 아니야?" 라며 실실 웃기도 했다. 하지만 창업이나 브랜딩, 마케팅 등에 대한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할 때면, 저자와 강사들이 마치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빤히 쳐다본 것처럼 "그렇게 하면 망한다고, 이 멍청아!" 라고 야단을 쳤다. 그 와중에 조슈아는 재직 중인 회사가 바빠져 함께 하기로 한 일은 거의 손도 대지 못 하고 있었고, 나는 매일 혼자 망상과 절망을 오갔다.


그 동안에 함께 퇴직한 후 컨설팅 회사에 스카웃되어 간 동기가 다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기도 하고(빈말일 가능성이 크다), 예전에 작성해 두었던 이력서를 보고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여러 번 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내 성격이 회사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잠식되어 버린 나는 그 모든 걸 무시했다. 그런 주제에 망상에서 절망으로 넘어가는 순간에는 '아, 아직 반 년도 안 쉬었는데, 나 아직 어린데, 지금이라도 다시 취업을 준비할까?'라는 고민이 들끓었다. 하룻밤 사이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꿈 두 개를 같이 꾼 것도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 잠든 밤이었다. 




그 날 잠에서 깨자마자 혼자 욕지거리를 한참 한 후에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나는 도망칠 곳이 없다. 내가 하기로 한 걸 해야 한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코너 끝에 몰려 몸부림치는 나를 누군가가 지켜보며 뭐가 됐든 해보라고 조용히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A.R(After Resignation) 1년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