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실
요즘 내 관심사는 온통 큰아들인데, 그러다보니 자연히 교육서들을 자주 읽게 된다. 그러다 모처럼 한강작가의 에세이를 손에 잡았다. 나는 한강 작가의 소설을 서너 작품 읽었지만 완전히 그의 팬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다. 존경하지만 좋아하는 정도는 아닌 작가였다. 그런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했을 땐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지만 국뽕을 제외하자면 기뻐 날뛸 정도는 아니었다. 자긍심! 그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 얇은 에세이를 읽으며 마음이 바뀌었다. 소설가로서의 루틴, 작품을 쓰던 과정들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진정성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그래, 이런 사람이 소설을 쓰는 거지. 작가가 작중 인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을 체화하고 그것을 쓴 소설에서 독자는 함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몸으로 쓴다는 작가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몸으로 쓰지 못한 글은 온전히 다가오지 못했다는 경험이 떠올랐다. 작중 인물의 한계를 건드리며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의 능력은 바로 이 치열함에서 왔구나 존경스러웠다. 그렇게 던진 질문 하나,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대충 사랑해서는 안 되는 건가?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대충 사랑해서 쉽게 얻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한강 작가의 소설은 늘 그건 안 된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래서 읽을 때에도 힘들었구나. 사랑과 고통은 뗄 수 없는 것이구나.
작가가 북향 마당에 정원을 가꾸는 일도 인상깊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큰아들이 자꾸 떠올랐다. 북향,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마당에 나무를 심으며 햇빛을 쬐게 하기 위해 거울을 둔 상황이 어떤 깨달음을 주는 듯 했다. 너의 마음에 만약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나 역시 거울을 들어 너에게 햇빛을 쬐게 해 주어야겠다는 마음가짐 말이다. 넌 왜 북향에 가서 서 있냐고 다그치는 대신 말이다. 그렇게 은근하게 정원을 가꾸던 어느 날의 일기를 옮겨본다.
3월 25일
블루베리꽃 봉오리가 햇빛을 받은 아래쪽 가지에서만 부풀고 있기에 오늘은 거울의 각도를 올려주었다. 매일, 매 순간 빛이 달라진다.
거울만 갖다 댄다고 될 일이 아니다. 섬세하게 지켜보고 필요한 만큼의 빛을 줘야 한다.
6월 6일
(생략)
식물을 기를 때는 오직 그들이 잘 자라기만을 바란다. 나와 상호작용을 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농담도 위트도 감사도 따뜻한 말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잘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자식을 키우는 건 식물을 키우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동물을 키우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되는데 동물을 키우듯 키운 건 아닐까 돌아본다.
한강 작가의 소설은 내게 작품에 따라 호불호가 달라졌다. 그래서 누가 한강 작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난 한강 작가의 태도를 좋아한다고. 한강 작가가 쓰는 소설은 믿을 수 있고, 한강 작가가 쓰는 시와 에세이는 마음이 움직인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