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반과 티볼 대항전을 하는 날이었다. 그날 시간표가 무엇이 되었든 아이들 눈에는 체육만 보였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동상이몽이었지만. '아싸, 체육 두 시간!' 대 '아, 체육 나가기 싫다.'
시간은 정해진 속도대로 흘러갔고, 티볼 시합이 시작되었다. 지난 번에 남학생 경기만 하고 끝냈던 터라 여학생들 경기로 시작되었다. 아직 글러브로 공을 잡고 패스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한 여학생들의 경기는 일단 치기만 잘 치면 무조건 점수로 이어졌다. 양팀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승부는 남학생들의 경기에서 났다. 얼마나 유효하게 치는지와 수비를 얼마나 정확하게 하는지의 변수가 있었고, 그 점에서 옆 반이 우리반 보다 처음부터 실력이 앞서 경기 결과는 이미 옆 반의 승리로 결정된 듯 했다. 그런데 문제는 옆 반 남학생들의 입이었다.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이기고도 불만이 많은 팀은 참말로 오랜만에 본다.
-아니 니들은 내가 심판을 봐도 불만이고, 너희 선생님이 심판을 봐도 불만이니 심하지 않냐?
- 좀 즐겁게 하자.
라는 말을 수시로 해야 했다.
마지막 3회말에 우리 팀이 수비를 할 때였다. 이미 승패가 결정난 터라 우리 반 아이들은 김이 빠질 만도 했다. 그런데도 땡볕에 서서 웃고있는 우리 반 남학생들을 보니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힘들어하는 여학생들을 대신해 3회는 수비를 남학생들에게 맡긴 참이었다. 아이들은 필드에 한 번 더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지만 날은 뜨겁고 게임은 질 판이니 사기가 떨어져 아주 신이 난 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도 옆 반 남학생들은 그렇게 궁시렁거릴 수가 없었다. 내 귀에도 거슬렸지만 우리반 아이들 귀에도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때 우리반 아이 하나가 반 아이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 야, 어차피 졌어.
아니 저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 그러니까 우리는 화내지 말자. 인성으로라도 승리해야 해.
아니, 너도 중드 보니?
며칠 전 본 중드 <사조영웅전 2025-화산논검>이 떠올랐다. 옴니버스 식의 드라마인 <사조영웅전2025> 중 <동사서독>은 동사 황약사와 서독 구양봉의 청년 시절의 모습을 그리는데, 둘의 실력이 애시당초 비등비등할 것으로 예상했건만 청년 시절엔 구양봉의 실력이 한참 모자라다. 서역에선 잘 나갔는데 황약사를 비롯한 송나라의 무공 고수들을 보니 자연히 겸손해진 구양봉이 말했다.
남송에 나 구양봉의 적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 며칠 동안 깨달았소. 난 아무것도 아니었어. 남은 건 이제 도리와 의리 뿐인데 그것마저 못 지킨다면 죽을 자격도 없소.
아이들은 중드도 안 봤을 것이고, 구양봉도 모를 텐데 말뜻이 참으로 통하였다.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였고, 자신에 대해 겸손하였고, 정의로웠다. 그리하여 구양봉은 훗날 화산논검으로 천하제일을 겨룰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듯 우리 아이들은 나날이 성장할 것이 틀림없다. 안 되면 배운다는 자세로 즐기면 되는 것을, 이기고서도 진 사람과 같이 행동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다. 같은 드라마에 나오는 시궁선생의 말도 하나 보태보자.
질 것 같으면 덤비지 마. 그냥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라고. 무공은 허풍이 아니야.
이것을 우리 아이들의 입장에서 다시 쓰자면
덤볐지만 졌어. 그냥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지. 티볼은 허풍이 아니야.
다음에 인성에 실력을 보태어 다른 명언을 만들어내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