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예쁜 사람을 보면 무척 부럽다. 섬섬옥수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반지 하나 맘껏 껴 봤으면 좋겠다. 예로부터 손가락이 짧고 두툼하면 재주많은 손이라고 했다던데, 그 말마따나 재주라도 있으면 좀 덜 억울했겠다. 마이너스의 손이라 손만 대면 누군가 수습해줘야 할 지경이니 재주와 손의 상관관계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 모양이다. 그저 친구들과 포켓볼을 치러가도 손가락 사이에 큐대가 잘 들어가지 않아 의도하지 않게 즐거움을 주고, 친구들과 맞춘 우정반지가 유난히 더 가늘어 또 웃음을 준다는 것 정도가 장점이라면 장점이랄까?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 못생긴 손조차 너무 귀하게 여겨진다. 몇 년 전 류마티스 관절염이 의심될 정도로 손이 붓고 아팠는데, 그때는 건강하기만 하다면야 무조건 예쁜 손으로 대우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핸드크림도 겨울에만 바르고, 악세사리도 손에는 일절 착용하지 않았었는데 아프고 나니 애틋한 마음이 생겨 수시로 핸드크림을 바르고 반지와 팔찌도 몇 개 샀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걸 왜 산 거야?' 할 정도의 장신구도 있지만 어쨌든 그때 산 것 중에 잘 골라서 지금은 손을 방치하지는 않는다. 다행히 손의 병증도 류마티즘이 아니었고 아끼면 덜 아프고, 덜 아끼면 더 아픈 보통의 노화를 겪고 있다. 손이 덜 아프니 손 핑계로 그만둔 독서일기를 다시 써보기로 했다. 물론 손은 한참 전부터 덜 아팠는데 일기를 쓸 결심을 못 한 것이다. 개인사가 복잡하여 겨를이 없다가 갑자기 쓰기로 마음 먹었다. 결심이란 원래 갑작스러운 거다. 그게 올해 8월 14일부터이다.
가장 최근의 독서일기가 아들이 사춘기에 돌입할 즈음에 시작한 둘만의 프로젝트였으니 벌써 5년 전이다. 5년이라니 참 오래도 손 핑계를 댔었구나 싶다. 그 기념은 [아들, 뭐 읽어?]라는 책으로 묶어둔 참이다. 그 이전에는 알라디너로 나름 활발하게 활동할 때 '손으로 쓰는 독서일기'라고 올리곤 했었다. 그 두 일기장도 물론 남아있다. 그 사이 텀은 2년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번엔 정말 오래 걸렸다. 해야지 해야지 미루다가 오은 시인의 [뭐 어때]를 읽으며 '나도 매일 뭔가를 꾸준히 해야지!' 갑자기 자극을 받아 시작했다. 역시 오은 시인은 나의 자양강장제이다. 마침 그간 쓰고 있던 원고도 보냈고, 책이야 의도하지 않아도 매일 읽으니 독서 일기가 그리 별스런 일은 아니라 당장 시작해도 문제는 없었다. 자연스러운 일을 꾸준히 하는 게 우선 목표이다.
그렇게 손으로 쓴 매일의 기록이 서투르지만 쌓여가고 있다(이런 마음을 담아 다이어리는 공유서재 '첫서재'의 굿즈에 쓰고 있다. 이 다이어리의 표지에눈 첫서재의 슬로건인 '서투름이 쌓인다'가 새겨져있다.). 잘 쓰고 못 쓰고도 없고, 어렵고 쉽고도 없으며, 길고 짧은 것도 없다. 일기를 쓰는 일은 내일 당장의 쓸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쓰는 지금과 먼 훗날의 되돌아봄의 쓸모를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이기에 묵묵히 그저 쓴다. 내 개인의 독서사이니 나만 좋으면 된 것이다. 그렇게 내 맘대로 쓰다보니 자연 분량은 매일매일 달라지고(하지만 밥도 그릇의 크기와 상관없이 한 그릇을 무조건 비우는 식습관처럼 글도 페이지에 채우는 분량 습관이 있어 대부분은 공책 끄트머리에 맞춰져있다.) 그에 따라 생기는 빈자라기 어느 날 보니 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빈자리에 역시 거의 매일 찍는 독서 사진들을 인쇄해서 붙여두니 제법 학창시절 다이어리 꾸미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 참 재밌구나 싶은 마음에 그 다음부터는 굳이 한 페이지를 꽉 채우려 하지 않는 날들도 생긴다. 물론 그게 늘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지난 주엔 독서 모임을 하기 위해 [경험의 멸종]이라는 책을 읽었다. 새겨들을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몸, 특히 손을 많이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지금으로부터는 점점 몸을 쓰지 않고도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되니, 그렇다면 인간이 몸이 무슨 쓸모일까 하는 질문에 공감했다. 그러면서 내가 손을 써서 일기를 쓰는 것, 책을 읽을 때 메모를 하는 것, 아이들에게 뇌발달을 내세우며 자꾸 손으로 그리고 오리게 하는 것들이 모두 현생 인류의 조건을 지속하는 활동이었다는 것에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그래, 계속 써야겠어! 계속 오리고 붙여야겠어! 그렇게 오늘도 내일도 읽고, 쓰고, 붙이고 손을 써서 소멸되어가는 인간성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싶다면 너무 거창한가? 고작 일기 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