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와 달리 둘째는 어리지만(11살) 제 할 일을 꽤 믿음직스럽게 해내고 있다. 둘째가 뭘 하면 불안하지가 않은데, 가령 시내버스를 반대로 타고서도 당황하지 않고 아는 곳에서 내려 반대편으로 알아서 가며 확인 전화를 하는 경우처럼 의연함이 그 아이에겐 있다. 그래도 버스를 탈 때가 가장 불안하긴 하다.
토요일마다 나는 학점은행제 공부를 위해 한양대로 다니고, 아들은 혼자 버스를 타고 평생학습관에서 바둑을 배우러 간다. 어제는 중간고사가 있는 날이라 일찍 귀가할까 하다가 모처럼의 여유가 아까워 학우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간 박물관은 안팎으로 사람도 많고 행사도 많았다. 그중 핫하다는 사유의 방과 내가 좋아하는 중국전시관에만 들러 집으로 왔다. 평소 오는 시간과 같은 시간이라 식구들은 그저 내가 공부하다 온 줄 알겠지, 하며 씨익 웃음이 났다.
늘 하던대로 지하철에서 둘째에게 문자로 버스 탈 시간과 챙길 것을 알려줬는데, 알겠다며 아들이 두끼 떡볶이 데이트 신청을 했다. 나도 나대로 실컷 놀았겠다 이런 정도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응해야지! 약속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온다.
- 엄마, 정말 눈 앞에서 버스를 놓쳤어!
- 엄마가 출발하라고 할 때 출발한 거 맞아?
- 응 맞아!
- 어느 쪽에서 탔어?
- 주민센터쪽
- 병원쪽에서 타라니까. 그래야 버스가 오는 시간에 여유가 있다고 했잖아.
큰 아들 같으면 짜증을 냈거나, 위축되었을 텐데 둘째는 기대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 응 다음엔 병원쪽에서 탈게.
쭈그러들었던 미간이 슬쩍 펴진다.
- 어. 그래 10분 기다려야겠네. 조심해서 가.
5분 후에 다시 전화가 온다. '이럴 애가 아닌데?'
- 엄마 큰일 났어! 나 교통 카드를 안 가져왔어!
버스가 곧 도착할 시간인데, 이 무슨 말인가.
- 아니 내가 아까 챙기라고, 충전되었냐고 물었잖아.
- 어.
- 집에 가는 길이야. 얼른 가지고 와서 갈게.
- 지금 갔다가 버스를 다시 기다리고 바둑을 가면 바둑이 끝나기 10분 전이야.
- 그래도 가고 싶어.
바둑이 문제가 아니라 떡볶이가 문제인 거겠지.
- 오늘은 그냥 바둑 쉬자. 엄마도 집으로 갈게.
- 아니 갈게.
- 아니야. 집에서 기다려.
전화를 끊고, 살짝 열이 올랐다. 여유로웠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두 녀석이 어째 형제 아니랄까봐 이러는 거야? 안 그러던 녀석까지 저런다는 둥 혼자 자가발전을 하며 평생학습관에 헛걸음하고는 씩씩대며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띠릭 문자가 온다. 아니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자가발전기가 급정지를 하더니 미간도 다시 펴지고 심지어 입꼬리가 올라간다. 도대체 얜 인생 몇 회차인거지? 평소답지 않은 극공손체를 사용하며 전투 태세의 적군을 물리칠 수 있다니! 너, 나 몰래 손자병법 배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