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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드일기>의천도룡기,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리다.

by 횸흄

김용의 '사조 삼부곡' 중 가장 먼저 좋아한 것은 <의천도룡기>였다. 1993년이다. 이때 <의천도룡기1986>의 장무기 역을 맡았던 양조위에게 반했고, 덕분에 내 아이디는 그 이후로 쭉 그의 이니셜과 나의 이니셜에 93을 붙인 형태이다. 그 이후에도 <의천도룡기1986>는 몇 번을 봐도 지겹지가 않았고 그 외 다른 버전을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다 2019년에야 새로운 버전의 <의천도룡기>를 만날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세대의 장무기는 누가 어떻게 연기를 하려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서, 또 보고난 후에도 계속 생각나는 사람은 장무기가 아니라 양소 역할의 배우였다. 1986년 판에서도 호감가는 외모이긴 했지만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던 양소였는데, 이 무슨 일인가? 양소 역할의 린위선(林雨申)은 그 이후 내 마음에 저장이 되었지만 반대로 장무기 역할의 배우는 내 기준에서는 전혀 인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이 당시에는 그저 장무기 역할의 배우가 덜 매력적이고, 양소 역의 배우가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후 장무기를 연기했던 쩡순시 (曾舜晞)의 연기에 믿음이 생기면서부터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지?


그러다 올해 소설로 <의천도룡기>를 읽기 시작했다. 내 기억이 잘못되었는지, 쩡순시가 잘못했는지 아니면 1986년의 양소 역할을 한 배우가 잘못했는지 좀 따져볼 마음도 생겼다.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소설에서는 1986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양소의 특별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육중한 체격의 2003년판 양소가 존재감은 더 컸다. 그렇다면 2019년 판의 양소의 멋짐은 감독의 재구성이었던 걸까? 점점 그쪽으로 무게감이 실릴 때 멸절사태를 보고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 감독, 양소랑 멸절사태 아니면 린위선이나 저우하우메이 좋아하네! 이런 생각은 1986년 판과 2019년 판의 멸절사태를 모두 만난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1986년 판의 멸절사태는 저승사자처럼 무섭기만 했는데, 2019년에는 한때 주지약(여자 주인공 중 한 사람)이었던 배우 저우하우메이(周海媚)를 캐스팅하였으니 간극이 너무나 컸다. 소설 속에선 아미파의 장문인 멸절사태는 독선적이고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로만 등장하지 미인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2019년의 멸절사태는 카리스마가 있되 보호본능이 들기도 하였으니 원작에 쓰인 것과는 달랐다. 이 감독, 고운 거 좋아하는구나!

1986판은 비교적 원작에 충실하게 재현하였다. '사조삼부곡' 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 좋아한 작품이었지만 소설로 그리고 드라마로 보다가 보니 그건 그저 양조위 '빨'이었다. 사춘기 시절 장무기로 분한 양조위는 정의롭고 순수한 눈빛으로 드라마 속 여인들의 마음을 훔쳤듯 내 마음도 앗아갔고 이후 그는 내가 가장 믿는 배우였다. 그런데 작품 <의천도룡기>로 말하자면, 이건 장무기에게 몰아줘도 너무 몰아준다 싶고 그의 변심은 정말 극도로 짜증이 날 지경이다. 2019년 판을 보면서 우유부단한 장무기가 아니라 지고지순한 장무기라 좀 지루한 면이 있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 우직함 역시 감독의 해석이었던 모양이다. 원작 소설을 보니 뒤돌아서면 다른 여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보다는 우직한 쩡순시 표 장무기가 훨씬 매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감독, 좀 괜찮은데? 이런 의도였다면 쩡순시 보다 더 어울리는 장무기는 없지 싶다. 그러니 장무기도 굿 캐스팅인 걸로!


'사조삼부곡'의 남자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한 여인만 사랑했다. <사조영웅전>의 곽정은 시대의 영웅이었으나 아내 황용의 말에는 무조건 따랐고, <신조협려>의 양과는 세상의 손가락질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용녀를 사랑했다. 그런데 장무기는 도대체 난봉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주구진이라는 여인에게 홀딱 반해서 불구가 되더니, 괴팍한 성품의 아리에겐 결혼을 약속하고, 다시 만난 주지약에게 설렜다가 질렸다가 하더니 결국 조민과는 애증의 관계를 맺고, 그 사이 소소와 헤어질 때는 끌어안고 애가 끓더니 또 다시 주지약, 조민 왔다갔다 한다. 아리가 죽고 소소가 떠나고 양불회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기 망정이지 이거 참 <의천도룡기>의 도룡도와 의천검은 그저 거들 뿐 결국은 <장무기애정사>가 아니고 뭔가 말이다. 사실 그간에도 장무기 캐릭터 자체에 대해서는 그 우유부단함이 못마땅했었는데 소설을 읽으니 김용 선생께서 뭔가 이때 슬럼프였나 싶은 생각도 들 정도로 이제는 세 작품 중 가장 아쉬운 작품이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낄 수 있다. 양조위에 눈이 멀었을 땐 <의천도룡기>의 모든 것이 맘에 들었고 린위선에 눈이 멀었을 땐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만 빼고 다 맘에 들었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니 장무기가 제일 마음에 안들고, 양소도 별 볼일 없다. 원작 소설에 대한 실망이 커지자 <의천도룡기 2019>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고, 감독님의 해석이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방영이 언제 될 지 모르는 최신판 <의천도룡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부디 원작에 너무 충실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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