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말] 교육청에 신고할 거예요!

by 횸흄

초등학교는 중고등과 달리 담임이 거의 모든 교과를 다 가르치다보니 부모 다음으로 아이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과목의 경우 수업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개 수업 연구는 방과후에 남아서 하면 되지만 과학 시간 전에 실험 도구를 설치한다거나, 체육 시간 전에 운동 기구를 준비하는 것은 앞뒤 수업 사이 10분 쉬는 시간으론 부족하다. 심지어 아이들을 인솔해서 데리고 왔다갔다 해야 하니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과학이나 체육이 영어보다도 더 전담 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체육의 경우 방금 전까지 수학 일타 강사의 모습이었다가 운동부 코치가 되어야 하는 역할의 전환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생각해 보라, 정승제가 10분 후에 홍명보가 되는 게 쉽겠는가? 둘은 전혀 다른 재능을 가진 사림인데, 한 사람이 상반된 두 가지 재능으로 임한다는 게 나로선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운동장으로 나가는 것은 신체적인 활동이 아이들에겐 꼭 필요하며, 그것을 제약하는 것은 교사의 직무 유기일 수 있다는 지극히 교육자적인 마음이다. 속으로는 '아 체육 진짜 싫어!' 이러면서 나도 농사일에 끌려가는 소의 기분이란 말이다. 그래도 막상 나가면 아이들이 즐거워 하는 모습에 보람도 느끼고 덩달아 신이 나기도 한다. 특히 시합을 할 때의 아이들의 열정이란 40분에 담기엔 모자라다. 그런데 시합이라는 것을 하면 심판을 누가 본다? 교사가 본다. 바로,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교사의 눈은 판독기가 아니므로 늘 편파판정 시비에 시달린다. 아, 체육 진짜 싫어!


팀을 짜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팀의 리더를 두 명 뽑고 토의를 통해 팀을 꾸렸던 1학기 내내, 한쪽으로 치우친 승부가 마음에 걸렸었다. 2학기엔 팀의 리더를 바꿔서 팀을 꾸렸지만 역시나 균형이 맞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지정해서 팀을 짰는데 그래도 맞지 않는다. 이건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AI가 짜도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균형은 매번 틀어진다. 체육 시간이 올림픽 경기도 아니고 즐겁게 매너있게 활동하면 되는 것인데 이기고 지는 것만 관심을 두는 모습이 썩 예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실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괜히 위축되기도 한다. 다른 반 보다 체육 시간에 상호 격려하는 것을 미덕으로 갖춘 반인데도 이렇다.


이날의 킥런볼 경기도 그랬다. 애초에 팀을 짤 때는 균형이 맞아보였는데 막상 경기를 시작하니 한 팀의 패스가 너무 잘 이뤄져서 이번에도 치우친 승부가 예상되었다. 그래서 공정하지는 않지만 루의 위치를 조금씩 옮긴다거나 수비수 한 명을 뺀다거나 해서 2점 정도의 차이로 만드는 내 나름에는 '운영의 묘'를 발휘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9대 7이 되었고, 내 손에는 이기는 팀의 최고 수비수 하나를 묶어둔 참이다. 팔짱을 끼며 여유를 부리던 아이가 9대 7이 되자 갑자기 편파 판정을 운운하더니 큰 소리로 "교육청에 신고할 거예요." 소리치는 게 아닌가? 하!


이 아이는 교육저 집안의 아이인데도 이런 말을 쉽게 하다니! 귀를 의심했다.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인 건가? 내 아들을 떠올리니 그럴 법도 하다. 몇 년 전에도 북아트 강사 수업 때 가위질을 안 하는 아이더러 하라고 독려했을 때 이런 말을 들었는데 또 듣다니! 그때 나는 남몰래 눈물을 훔쳐야했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충격받진 않았다. 시대에 감정도 적응하나 보다. 그때 그 아이는 자기는 선생님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냥 나온 말이라고 했고 실제로 졸업한 후에도 나를 찾아오며 친근함을 표현한 아이었다. 그런 아이도, 온 집안이 선생을 하는 집 아이도 이 말이 이렇게 쉽게 나오는구나! 편파 판정을 했다고 교육청에 신고를 할 거라면 그보단 먼저 비디오 판독을 도입하던가, 차라리 교내 시합 금지를 하는 게 낫겠다. 정말 더러워서 못 해먹는다는 말이 달리 있는 게 아니다. 두 번 들으니 더 기가 막혔다.


일단 시합을 가까스로 9대 8로 마무리 지으며, 그 아이를 따로 불렀다. 자기가 여전히 잘했다는 듯 큰 소리 치는 아이에게 따끔하게 알려줬다. 그건 너와 나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말이라고. 내가 너희의 잘잘못을 모두 신고로 처리한다고 말을 한다면 너희는 내가 편하겠냐고. 나 역시 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아이라면 나 역시 너를 불편하게 여길 것이라고. 그제서야 고개를 떨군다. 하지만 이 말을 얼마나 체감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라서 그런지 그 다음 시간에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을 건다. 예전엔 그것이 아이들의 해맑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어른의 말을 타지 않는다. 어른이 말을 해도 대답만 '네'하고는 끝이다. 그건 해맑음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책 제목처럼 '부끄러움을 가르칩시다' 외치고 싶은데, 아주 조금의 부끄러움도 극단적으로 치욕이나 수치의 감정으로 몰아가는 부모들 앞에서 그조차 가르치기가 어렵다. 그 옛날 분식집에서 선생님이 사주시는 떡볶이를 먹으면서도 민폐라고 생각해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던 그 아이들이 그리워진다. 그 모습이 애잔하여 더더 먹이고 싶었다. 지금의 아이들은 맡겨놓은 양 뭘 자꾸 달라는 것이 너무 뻔뻔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이는 뻔뻔한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부끄러움은 모욕이 아닌데, 뻔뻔한 게 해맑은 게 아닌데 세상이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을 아이들의 모습에서 너무 자주 본다. 그게 슬프다.


일주일 후 운동장에 나가기 전 판정에 대한 안내를 했다. 우리는 체육 시간을 왜 하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했고 아이들은 체력을 단련시키고 협동심을 기른다는 모범적인 답을 말했다. 그래서 시합의 경우 선생님이 관여해서 조정하겠다고 하니 일주일 전 신고를 운운했던 아이가 제 발이 저리는지 죄송하다고 말한다. 진짜로 죄송한 건지 내가 말을 꺼내는 이유가 제 탓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자진납세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몇 주 전부턴 체육 시간 끝나고 리뷰를 좀 하는데 그게 꼭 필요한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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