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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Oct 05. 2021

[중드 일기]중드 키즈의 탄생과 소멸

형편이 좋았던 집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얼리어답터였던 아버지 덕분에 비디오비전(TV와 비디오플레이어의 일체형 가전제품)이 있었고 덕분에 동네 비디오 가게 문턱이 닳도록 비디오를 많이 빌려봤다. 그중 9할은 중국 무협 시리즈물과 홍콩 영화였다. 대여는 주로 아버지의 특권인지라 그의 취향은 고스란히 우리의 취향이 되어갔고 그렇게 나는 중드 키즈가 되었다.


다른 친구들이 <가위손>의 조니 뎁에 매료될 때에도 우리는 <가유희사>를 더 쳐주는 집이었다. 서울에선 '헐리우드 키즈'가 탄생하던 시절인데 영화관 하나 없는 마을에서 주말의 명화가 아닌 외국 작품을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했고 솔직히 지금이나 그때나 중드는 중독성이 매우 강하여 발을 담그지 않으면 모를까 한 번 발을 담근 이상 '할리우드 키즈'는 물 건너간 셈이다.  지금 <오징어 게임> 조차도 나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걸 보면 중드를 향한 중독성과 충성도는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아무튼 그때 우리집 최고 인기 배우는 조니 뎁도 탐 크루즈도 아닌 <초류향>의 정소추였다. 그렇게 나는 중국 무협 시리즈물에 매료되어 살았고 홍콩 영화를 보며 휴지 한 통을 다 적시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처음 만난 이가 양조위로 내 아이디의 영문자는 그와 나의 첫 이니셜을 합친 것이요, 93은 내가 그의 평생 팬이 되기로 작정한 해이다.


나에게 '장무기'는 양조위이다.  1986년판 <의천도룡기>는 그후 두 번 정도 다시 봤는데 20년이 지나 다시 봐도 1986년판은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 장난기 어리고 어리숙한 모습의 양조위가 얼마나 그윽하고 깊은 눈매를 가지고 있는지 당시 4대 천왕(유덕화, 여명, 장학우, 곽부성)이나 장국영에 빠져있던 친구들은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양조위를 거론하면 "누구?"라는 반응을 받았으니까. 왕가위를 만난 이후의 양조위는 낯설 정도로 다른 모습이었지만 "역시!"라는 마음이 더 컸다.  높아져가는 인기에 마음이 헛헛해졌지만 학창 시절 내내 양조위가 나오는 작품은 물론이요 그렇지 않은 중국 드라마와 홍콩 영화들을 무수히 보며 지냈다. 여전히 나는 중드 그리고 홍콩 키즈였다.


 시내로 나와 난생 처음 본 영화는 장국영 주연의 <야반가성>이었다. 물론 지금은 <오페라의 유령>도 매우 좋아하지만 그때 그 영화는 반드시 홍콩에 가서 홍콩 사람과 연애를 하겠다는 어린 날의 결심을 더욱 굳히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홍콩의 느와르의 인기가 식고 중드에서는 CG가 난무해지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 집 비디오비전의 수명이 줄어들면서 우리는 더 이상 중국 무협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았다. TV는 새로 샀지만 비디오는 다시 사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중국 드라마와 영화가 재미가 없어진 걸까? 양조위의 인기는 높아지고 그가 맡은 역할에 세련됨이 더해져 지난 날의 그 어리숙하고 귀여운 양조위를 만나는 건 어려워졌다. 중국 영화의 CG는 안쓰러웠다. 차라리 배는 움직이는데 강물은 움직임이 없는 누가봐도 합성이 분명한, 그러나 합성이라는 것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던 시절이 그리웠다. 곽부성 주연의 <풍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작품을 기점으로 한동안 중드나 홍콩 영화를 좀 멀리했다. 왕가위의 영화만 간간히 보곤 했다.


양조위를 제외함 다른 중화권 배우들이 내 마음 속에서 다 사라진 건 내가 어른이 될 무렵이었다. 겉멋이었을까 때가 그랬던 걸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졸면서도 '프랑스 영화'를 보았다. 어설픈 발음으로 '一天一點愛戀'을 따라부르던 아이는 샹송을 더 배우고 싶어졌다. 중드는 인물 관계도는 복잡하지만 메시지는 단순한 반면 프랑스 영화는 인물은 두셋만 나오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너무 어려웠지만 그게 멋있었다. 그렇게 중드 키즈이자 홍콩 키즈는 사라졌다. 내가 다시 중드를 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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