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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Jan 04. 2022

[교단 일기] 소란이여 잠시만 안녕,

예전엔 텅빈 교실을 보면 좀 쓸쓸했다. 졸업을 시킨 날엔 우는 날도 많았다. 다음 해가 되어서도 창밖을 쳐다 보면 전년도 아이들의 환영이 보이곤 했다. 그래서 새학년에 가장 늦게 적응하는 건 아이들이 아닌 내가 되었다. 교사가 적응을 못해선 곤란했기에 자신을 단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새로 만나는 일에 익숙해져갔다. 요샌 새 학년이 되어도 아이들 얼굴 익히려고 노력하지 창밖을 쳐다보지 않는다. 급기야 졸업생을 냈는데도 오늘은 눈물은 커녕 환하게 웃으며 보냈다. 예전엔 아이들이 떠나고 난 한참 후까지 교실은 난장판이었는데 요즘은 아이들이 떠남과 동시에 칼같이 정리를 한다. 뭐가 그리 급해서 다 보내버리려나 싶기도 하지만 모든 게 사라진 풍경이 너무 마음 편안하다. 


아이들을 보내면서 서운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아이들의 물건이 비워진 교실을 보니 괜히 상쾌하기도 했다. 직업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이 직업을 천직이라고 여긴 적은 없지만 아이들과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차선을 다해 살아왔다. 그런데도 오늘 텅빈 교실이 너무 단정하고 맘에 들었다. 물론 오늘도 한 고비는 위험했다. 아이들이 쓴 편지 중에 일 년 내내 나에게 꾸중을 듣던 아이인데 올해가 가장 좋았다고 자기도 자기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쓴 한쪽 가득한 편지를 읽다가 울 뻔했다. 그 아이는 내 눈물을 기대하는 듯 내가 읽는 동안 옆을 지키고 있더라만 그럴수록 나는 이를 악물었다. 뭉클할 상황을 모면하는 기술이 늘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그때 뿐이었고 오늘 내내 감정이 북받칠 틈은 없었다. 그러기엔 아이들은 여느 날과 같이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이 떠나간 자리에 편안함을 느끼는 나는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아이들 탓을 해 보려고 한다. 6학년을 마지막으로 한 것이 2005년이고 무려 16년만에 다시 6학년을 맡으며 긴장을 했었지만 그때의 아이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이들은 순수했고 밝았다. 그리고 동시에 어렸다. 어린 데 세상 물정에는 빨랐다. 마음을 주는 것과 표현하는 것보다는 마음을 받는 것에 더 익숙한 아이들이었다. 이런 것까지 말로 가르쳐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세심하게 가르치곤 했다.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거야. 이럴 땐 이런 마음을 갖는 게 좋지!' 등등 유아 때 익혔어야 할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하는 법을 열셋 나이의 아이들에게 가르치자니 여기가 6학년 교실인지 어린이집인지 한숨이 나오곤 했다. 아이들은 열 셋의 나이에도 떼를 썼고 자기가 먼저 하겠다고 악다구니를 썼다. 요즘 애들은 이런 건가? 우리 애도 이러려나? 모든 아이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을 나누는 것에 대해 인색한 것은 우리 집 아이나 학교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게 사춘기의 특성인가도 고민해봤지만 그럼 16년 전의 아이들은 사춘기가 아니었단 말인가? 졸업식이라는 뭉클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여느 날과 같았다. 몇몇 뭉클할 수 있는 아이들도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감정을 쏙 숨겼다. 진지한 상황이 그저 어색하기만 한 아이들이다. 그 점이 내내 아쉬웠는데 마지막 날까지 그렇다니 내가 요즘 아이들에 맞추지 못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통지표를 나눠주면서 인스타 그램 릴스에서 본 유치원 인사법을 하나 따라해 봤다. 6가지 인사법을 그려놓고 아이들이 선택하게 한 후 그렇게 인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손 하트 그리기, 배꼽 인사하기, 포옹하기, 사랑의 총알 쏘기, 춤추기, 주먹악수를 하기로 정하면서 과연 포옹을 선택할 아이가 있을까 싶었다. 2명 있었다. 남자 아이 1명, 여자 아이 1명. 평소 말이나 행동으로는 아니었지만 눈빛으로 나에게 애정을 자주 표현하던 아이들이다. 이를 테면 나의 열성 지지자들. 많은 아이들이 인사와 주먹 악수를 택했고 친구들을 웃겨주려고 춤을 춘 아이들이 있었다. 사랑의 총알을 쏜 아이들은 포옹과 주먹 악수의 중간의 마음으로 선택한 듯 했다. 이 인사법을 하면서 아이들은 어색하지만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고, 용기를 내기도 했다. 이런 장면이 나오다니 무척 기뻤다. 아이들이 건조해지면서 나도 건조해지고, 아이들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 아이들이 사랑을 마구 표현하면 내 사랑도 표현이 풍성해진다. 너무 애들 탓만 하는 걸까? 교사가 연극 배우와 비슷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우리도 관객이 있어야 흥이 난다. 참고로 우리 반은 리액션 좋기는 학년에서 상위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리액션에 잔기술만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아이들이 준 편지를 읽어보면 올해가 자기 6년 학교 생활에서 가장 좋았다는 둥, 내가 선생님들 중 탑이라는 둥 마음이 나름대로 풍성하게 표현되었다. 그걸 좀 표정이나 말로 보여주면 좋을 텐데, 요즘 애들은 이런 건가? 그런데 나는 그게 좀 많이 아쉽다. 좋은 것을 좋은 티를 내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싫은 걸 싫은 티 내는 게 조심스러워야 하는 일인데 요즘 아이들은 그것이 반대가 된 듯 불호의 감정은 너무나 손쉽게 표현하고 칭찬이나 사랑의 마음은 아닌 척 한다. 그러다 가끔 그것이 제대로 표현되는 아이들을 만나면 너무 반갑다. 속으로 외친다. '너 같은 아이가 많았으면 좋겠어!' 한 해가 마무리 되면 아이들이 떠난 자리엔 아직도 아이들이 떠들던 소리들이 남아 있다. 그 소란함에 추억에 젖다가도 그 소란함이 소란함만이 아니라 서로를 보듬는 소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도리질을 치며 그 소란함을 말끔히 보내버리고 모든 사물을 치운 상태의 고요함을 만든다. 


오늘 방역 일을 해 주시는 분과 잠깐 짧은 인사를 나눴다. "한 해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학교가 밖에서 보는 것 보다 많이 시끄럽죠?" "아이고 고생이 많으세요. 애들도 많고 네~" 그 애들이 모여서 좋은 소리가 잘 안 난다는 게 저도 부끄럽다는 말은 생략했다. 요즘 애들에 맞춰서 좀더 연구를 해야겠다는 6학년을 마치며 든다. 그간 아이들은 어려서 그렇다고 치부했는데 열셋 나이에도 그러니 이건 좀 나와 아이들 간의 생각과 태도의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아이들이 좀더 좋은 마음을 많이 표현할 수 있도록 쉬는 동안 생각을 좀 해 봐야겠다. 내 아들부터 실험 대상으로 삼아 보자. 그러니 학교여, 잠시만 안녕!(육아 휴직인데 과연 연구가 될까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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