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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Jun 28. 2022

[생각일기]끝이 보일 때 무너지는 마음

아침에 아이 등교를 시켜주러 나선 길에 동사무소에 들러 코로나생활지원금 신청 및 장애등급신청서류 반환 업무를 보고 20여 분을 걸어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빌린 후 마트에 들러 엄마가 사달라던 자일리톨 껌과 디카페인 인스턴트 커피를 사서 다시 집으로 걸어왔다. 많이 걸었다 싶었는데 5900보라 생각보다 10000보 걷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 깨달았다. 하지만 5900라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가 올지 몰라 운동화 대신 젤리슈즈를 신었는데 이 신발의 착화감은 욕실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발의 피로가 극심해졌다. 하지만 마치 '폭풍의 언덕'을 연상시키는 바람을 맞는 가로수들과 화단의 꽃들을 보는 게 즐거웠고, 땀이 날 겨를을 주지 않고 목덜미에 느껴지는 바람의 손길이 너무 좋아서 발의 피로나 가방의 무게 따위는 덜 중요했다. 아마 날씨가 맘에 들지 않았더라면 버스를 탈 핑계를 충분히 만들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산책길이었다. 그렇게 2시간 가까이를 보내다 보니 아파트 입구 사거리가 눈앞에 들어왔다. 


이제 5분만 더 가면 집이다. 집에서 욕실화같은 젤리슈즈를 얼른 벗고 시원한 물 한잔 마시고 샤워를 하면 얼마나 개운할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그 개운한 상상과 상반되게 내 몸에 갑작스러운 무게감이 함께 왔다. 곧 길은 끝이 나는데 왜 나는 그 끝을 향해 질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그제까지 유지하던 걸음에도 미치지 못하게  지금 당장 쉬고 싶어지는 걸까?  바람도 마침 등 뒤에서 불어와 걸음도 더 가뿐해져야 했고, 비오기 전의 흐린 이 매력적인 날씨를 직관하는 것에 분명 나는 방금 전까지도 흐뭇함을 느끼고 있었으니 쉬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도리어 집에 가는 길을 더 둘러서 가볼까 싶은 마음까지 들었어야 합당했다. 그런데, 왜! 아파트 입구가 보이자 마자 참을성이 바닥이 나면서 누가 나를 좀 끌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거냔 말이다. 혼자 있었기 망정이지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징징거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젠 어른이니 아닌 척 할 수 있었으려나? 남은 속여도 나를 속이긴 어려운 법, 끝을 느껴버리는 순간부터 와르르 무너지는 건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게 걷는 일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는 게 떠올랐고, 이건 일반적인 것에 더해진 개별적 성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에 누군가를 오래 사랑한 적이 있다. 오래 만난 사이라 익숙함이 좋았고 꽤 잘 맞는 성격이라 이렇게 더 오래 지낼 수도 있겠구나 했지만 사실 그건 일종의 관성의 힘이었다. 늘 만나던 대로 만나고, 늘 가던 대로 가고, 늘 먹던 대로 먹는 그리고 다음에 또다시 반복하는. 어쩌면 관성도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상대방의 제스처에서 우리의 끝을 읽었다. 그 끝을 읽었다 한들 관성대로 지냈다면 진짜 끝에 다다랐을 때 나는 꽤 쿨할 수 있었을 텐데 끝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또 무너졌다. 저기가 끝인 줄 아는데 진즉에 끝을 느껴버려 볼썽사나워졌다. 끝이 오기도 전에 끝을 겪은 사람마냥 이별의 모든 것을 몸에 장착했다. 마치 아파트 입구가 보였을 때 신발도 벗고 그 자리에 퍼질러 앉고 싶었던 마음처럼 나는 그렇게 갑작스레 조급해졌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들켜버렸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끝은 쿨하지 못하게 맺어졌다. 미련도 없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기도 하다. 


내 오랜 철학적 의견은 서양말로는 '아모르 파티'요, 동양말로는 '평상심'이다. 합치면 주어진 운명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요동없이 살자는 건데, 그 놈의 끝만 보이면 이렇게 운명도 거부하고 싶고(수동적 거부, 피함) 평상심도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숙제를 마치기 1문제 전, 수련을 마치고 대련 시험을 봐야 하는 시점 등 내가 끝을 맺는 데에 조급한 것은 생활 전변에 퍼져있다. 그래서 뭔가를 맺어 결과를 내는 데에 늘 실패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근에 끝이 보이기 직전에 든 조바심으로 일을 그르친 경험을 해서 이건 제법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이름에 '孝'가 들어가서 효심이 남들보다 적은 편인데(이름은 반대라고 하더라), 내게 평상심이 매우 적어서 학창시절 윤리 책에서 하필이면 이 말이 눈에 꽂혔던 모양이다. 아, 평상심! 끈기! 해냄! 나는 언제쯤 끝을 아무렇지 않고 그제껏 걸어온 속도대로 가서 만날 수 있으려나? 다시 한 번 나에게 기회를 줘도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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