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충분히 나답게 하루를 시작했다. 시작은 무척 계획적이었다. 노트북과 반납책, 독서 통장을 챙겼고 아이를 등교시킨 후에 편의점에 들러 인스턴트커피를, 그것도 종이팩에 든 것으로 잘 구매했다. 10시에 문을 여는 도서관의 일정을 미리 숙지하여 최대한 돌아서 가는 버스를 이용해서 거의 10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으니 착착 잘 진행되었다.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게시판에 우리 아들의 얼굴이 나와있어 무척 고무되기까지 했다. 익숙하지 않은 사서선생님이 계셨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아들이라고 말해주는 팔불출미를 보여줬다. 여기까지는 다 내가 의도한 것이다.
그런데 어? 이상하다? 여기서 노트북 작업하시는 분들을 봤는데 테이블에 전기코드 꽂는 곳은 없었다. 당황했지만 독립된 공간을 대여하면 그곳에는 콘센트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공간 대여를 신청하고 방 하나를 차지했다. 아들이 빌려오라던 <깜냥 시리즈>도 챙겨두고 히가시노게이고 책도 하나 빌리려고 준비해뒀다. 이제 노트북을 꺼내고...?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뭔가 삐그덕 거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는데 노트북 충전기를 가져오지 않은 거다. 어제 정전으로 이 노트북에게 남은 배터리는 25% 남짓인데 난 이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이 먼곳까지 왜 온 것인가?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느니 25%의 배터리로 나는 브런치를 쓰기로 했다. 그게 바로 이 글이다.
아까 편의점에서 산 커피를 꺼내 마시려는데...어? 빨대 어딨지? 빨대구멍은 있는데 빨대가 없었다. 접착제 자국은 있는 것으로봐선 원래는 있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없는 제품을 사온 모양이다. 이걸 어찌 마신다? 일단 종이팩의 귀를 쫙 펴고 이빨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단단했다. 가위를 빌려볼까 생각하다가 예전에 여기에서 커피를 판 적도 있었으므로 빨대도 있지 않을까 싶어 안내데스크로 가니 비록 커피스틱이긴 하지만 불만을 가질 형편이 아니었다. 빨대꽂이에 꽂고 마시려는데....아 정말 나 왜 이러는 거야? 너무 꾹 짜서 종이팩밖으로 커피가 쭈욱 흐른다. 휴지 없는데 내 팔뚝을 보니 아침에 붙여둔 파스한장이 보였다. 집을 나서면서 뗄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안 떼길 정말 잘 했다. 폭신폭신한 파스라 티슈로 사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젠 헛웃음이 나온다. 이런 걸 빙구미라고 하는 건가?
이제 남은 배터리는 10%정도이다. 나의 빙구미는 나는 신경질이 나 죽겠는데 남들은 웃겨주겠는 모양이다. 아니면 온갖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이런 빙구미를 대방출하는 내가 좀 재밌는가보다. 내 빙구미가 대방출되는 주 영역은 대중교통분야인데 환승을 못 해서 돈을 두세 배로 내고 다니는 게 전문이다. 탈 때 찍은 카드가 아닌 다른 카드를 찍고 내려서 두 카드 모두 하차태그를 못하게 되는 경우가 가장 잦고, 숄더백 바깥에 온갖 카드를 다 꽂아둬서 하차태그 이미 끝냈는데 예민한 태그기가 나의 숄더백과 접촉해서 나도 모르는 새에 자꾸 버스를 타는 일도 있었다. 카드로 찍은 줄 알았는데 휴대폰 티머니로 찍혀서 또 중복 요금에 하차 미태그를 한 적도 있고, 얼마 전엔 지하철 갈아타다 말고 출구로 나가서 다시 교통비를 지불해야했다. 대중교통분야에서는 압도적인 빙구미를 뽐내고 있어 이런 사례들 말고도 나날이 갱신한다. 일신우일신이라고 했던가? 나의 빙구미는 일신우일신하고 있다!
대중교통분야에 대해선 내가 어찌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전에 버스는 떠나고 출구는 나왔기에 상황에 순발력있는 대처는 어렵지만 다행히 이젠 가방을 멜 때 태그기의 반대쪽으로 메고, 티머니는 지갑 안 가져온 날만 활성화하는 등 조심성이 늘었다. 그래도 내 자신이 한심하고 신경질이 나 죽겠다. 하지만 오늘같은 경우는 나름 긍정적인 면이 많다. 오늘 파스를 팔에 붙이고 오길 얼마나 잘했으며, 그래도 어젯밤에 노트북 배터리를 방전시키지 않은 게 어디며, 빨대 대신 스틱을 구한 점 등등 신통방통하게 잘 풀린 셈이다. 남편 회사 근처라 점심을 사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니 뭐 목적이 달성이 안 된다 싶으면 목적을 바꾸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오늘의 빙구미는 그냥 美를 붙여두기로 했다.( 승하차 카드 다르게 찍는 건 그냥 빙구다!) 남편이 별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뭐 먹을까? 다행히 남편 차를 타니 버스 잘못 탈 일은 없겠구나!
*배터리가 간당간당해서 일단 발행을 먼저하고 덧붙인다. 이점을 칭찬한다. 배터리에 관한 빙구미 에피소드도 내겐 무한리필이지만 컴퓨터 사용에 관한 빙구미는 다들 하나씩 갖고 있을 테니 그건 특별하게 다루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