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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Dec 13. 2022

[생각일기] 거절당하는 마음

지금 나를 만나는 사람은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어릴 때 동네 이쁜이로 자라 중학교 등굣길을 남학생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다녔던 터라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아본 적은 몇 번 있어도 내 마음을 고백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인기 절정의 여학생은 아니었기에 교만함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거절을 당했을 때 느껴지는 수치심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내 귓전을 맴돌 부끄러움들이 두려웠다. 이성친구에 대한 고백은 물론이거니와 간단하게 "오늘 우리 같이 놀래?" 이 말 조차도 쉽게 건네지 못했다. 그저 내게 다가오는 그런 제안들을 수락하거나 거절하거나 할 뿐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마음은 좀체 단단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호불호를 에두르지 않고 표현하는 내가 강단이 있어 보여 거절도 잘하고 거절을 당해도 쿨하게 받아들일 것 같아 보였지만 정작 나는 누군가의 호불호를 받아들일 단단한 마음이 없었다. 거절이 두려워 제안도 잘 하지 않았지만 되도록이면 거절도 잘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누군가에게 식사를 제안하거나 교제를 원하는 말을 내뱉지 않고 살게 되었고, 그건 그런대로 혼자 밥을 먹고 영화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일찌감치 키워주었다. 사람을 넓게 사귀기 보다는 깊게 사귀는 편이라 깊어진 관계 속에서 서로의 거절이 상처가 되지 않을 때쯤에야 제안도 거절도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와의 친밀도를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수락과 거절을 흔쾌히 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은 내가 '거절'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보여준다. 


오늘 거절을 당했다. 투고를 했었다. 1년 간 공을 들인 글이었고 반쯤은 포기하는 마음으로 제법 이름있는 출판사에 투고를 했다. 그렇게 딱 일주일이 흘렀다. 몇 달 전 같은 원고를 조바심을 내며 다른 출판사에 미완성 상태로 투고를 했었을 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던 터라 이번엔 제발 답변만이라도 오길 바랐는데 다행히 이번엔 답변이 왔다. 그것도 꽤나 다정한 답변이었다. 사랑하지만 헤어진다는 말처럼 좋은 원고이지만 거절한다는 모순적 답변이었지만 그래도 지난 번 무응답에 비해 얼마나 다정한지 나는 그에 대한 답장에 "다정한 답변 감사드린다."고 제목을 달았다. 


이번엔 수치심은 아니었다. 거절 메일을 받을 때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고 있었는데 메일 알람이 왔고, 길지 않은 메일이었는데 아직 나는 단련이 부족한지 마음이 요동쳤다. 자칫 눈물이 날 뻔 했다. 수치심은 아니었다. 100곳을 보내면 한 두곳 연락이 올까 말까 한 게 투고라고 하니 전혀 부끄럽지는 않았고 예상했던 결과였다. 슬픔이나 허무함, 기운 빠짐 같은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그 감정을 추스리면서 아직도 이렇게 거절에 익숙하지 못해서야 나이를 헛 먹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이르렀다. 책을 읽어도 집중이 되지 않았고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로 시작된 마음 글쓰기로 달래보자는 심정으로.


사람은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가령, 개를 무서워하면서도 나보다 더 무서워하는 아이를 위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개의 곁을 지나가는 담대함과 용기는 아이가 없었더라면 길러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검은 비닐 봉지만 바람에 날려도 기겁을 했던 사람이었는데 비로소 나는 개라는 동물을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의 생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외면했던 것들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태도가 조금씩 길러지곤 한다. 거절의 영역에서도 나는 아이를 키우며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아이가 잘 모르는 친구에게 들이대며 "같이 놀자"고 말하고 거절당할 때, 내 마음은 얼마나 요동이 치는 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놀자고 말하고 거절당하고도 아무렇지 않는 아이를 칭찬해줘야지.' 마음 먹는다. 아이는 어쩜 저렇게 거절에 대범할까? 


오늘의 거절은 그렇게 아이를 보면서 조금은 단련된 마음을 바탕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거절의 방법을 아는 상대에게도 감사하다. 거절은 당하는 마음 못지 않게 하는 마음도 중요하다. 그러면서 나의 거절들을 되돌아본다. 때로는 야멸찼을 것이고 때로는 우아했지만 다정함은 좀 부족했던 것 같다. 거절을 당할 때 못지 않게 거절을 할 때에도 나는 다분히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를 주고 수치심을 주는 상대의 거절은 나도 거절한다만, 오늘의 거절처럼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거절이라면 지금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니 가끔은 받아도 좋겠다. 하지만 투고로 인한 거절은 마음이 아프긴 하다. 짙뿌연 안개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거기에 안개 하나 더 한다고 내 마음이 더 무너질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나의 빛줄기를 내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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