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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키 Oct 10. 2023

우아함은 나의 무기

장마 끝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습기를 물어 꿉꿉해진 이불의 촉감 때문에 일찍 잠에서 깼다. 끈적이는 몸을 일으켜 간단히 물 샤워를 한 뒤 습관처럼 커피를 내렸다. 깊은 들숨으로 향을 마시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니 그제야 정신이 든다. 리처드 도킨스의‘이기적 유전자’를 몇 장 읽고 글도 조금 끄적였을 뿐인데 벌써 7시. 

집구석은 하루 종일 여섯 식구가 들락거리며 발자국을 찍어대는 통에 엉망이 되었다. 올여름은 습한 날씨 덕분에 거실 바닥의 발자국들이 점점 더 선명해진다. 한껏 오른 스트레스 지수를 한숨으로 누르며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잡생각을 지우는 데는 집안일 만한 게 없다.

빨래를 분류해 넣어 세탁기의 전원을 켜고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시끄러운 청소기 소리에 눈을 비비며 나온 녀석은 네 아이 중 막내뿐이다. 다른 녀석들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첫째는 방문까지 걸어 잠갔다. 

‘깨우지 말라, 이거지!!’ 

여름방학이라고 제멋대로 새벽까지 게임 하다가 오후 2~3시가 되어서야 일어나는 녀석 때문에 며칠째 날이 설 때로 선 상태였다. 나는 첫째의 방문이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결국 숨을 한번 크게 고르고 뒤돌아섰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일어나 씻고 나온 첫째 범이가 “엄마”하고 불렀다. 식탁에서 막내 공부를 봐주다 올려다보니‘바빠?’하고 묻는 눈치다. 녀석이 이렇게 조심을 떠는 걸 보니 심상치 않다. 왠지 예감이 불길하다. ‘왜?’하는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니 “이야기 좀 해”라며 자기 방을 향한다. 

나는 녀석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은 뱀의 허물처럼 벗겨진 옷이며 양말로 빈틈이 없다. 몇 마디 내뱉으려다가 꿀꺽 말을 삼키고 책상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범이는 최대한 나와의 곁을 좁혀 침대에 걸터앉았다.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있잖아요, 내가 엄마 말도 안 듣고 요새 공부도 잘 안 하잖아. 나 갖고 싶은 게 있거든요. 사달라는 거 아니고 알바만 하게 해주면 정말 열심히 공부해 보려고요.” 

“그게 뭔 데? 너 이제 알바 안 한다며!” 

2주 전 고깃집 알바에서 잘렸다기에 내심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뿔싸!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감정 빼고 이성적으로 대응하자! 이 순간만 넘기자. 범이 페이스에 말리지 말자!’

“내가 갖고 싶은 오토바이 모델은 엄마가 생각하는 것처럼 양아치 같은 거 아니에요. 아빠도 타시잖아요. 탑건에 나왔던 톰 크루즈가 탔던 그 오토바이에요, 입문용으로 나온 거라 위험하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이는 오토바이 스케치를 쓱 내밀었다. 이건 뭐, 거의 프레젠테이션 수준이다.

“당장 타겠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1년 동안 돈 모아서 내년 내 생일에(범이는 8월생이다) 면허 따고 그때 탈 거예요.” 

나는 평정심을 찾으려 애쓰며 물었다. 

“그러니까… 너는 내년에 오토바이를 사서 기어이 졸업 전에 타겠다, 이거네?” 

범이는 180cm가 넘는 날씬한 체형으로 꽤 봐줄 만한 외모의 호감형이다. 잘 놀고 운동도 잘하니 공부까지 더해주면 완벽한 인싸가 될, 그야말로 될성싶은 떡잎이었다.

‘원하는 대학에 붙어 멋지게 오토바이를 타고 입학식에 가면 좋잖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고졸과 대학생 중 누가 타는 게 더 간지나겠어?’

생뚱스러운 범이의 요구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톤은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조곤조곤하리라 결심하면서, 눈은 정확하게 범이를 바라보았다. 단단히 결심한 모양인지 아이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짧게 요점만 이야기하기로 다짐하고 빠르게 할 말을 떠올렸다. 말이 길어지면 내가 늘 손해였기에 이번에는 작정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우선 내가 믿을 수 있게 달라진 너를 보여줘. 한 달 지켜볼게. 그리고 아빠 보니까 알아서 더 조심하시더라. 너도 잘할 거라 믿어”

무심하게 일어나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와서야 내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1시간 30분이 흘렀다. 막내는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또 저녁 할 시간이다. 화가 난다. 7시에 북클럽도 있어서 저녁 하기 전 막내 공부 봐주는 걸 끝냈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사춘기 1호가 이제는 하다 하다 오토바이를 사겠다는 말로 나를 시험에 빠뜨린다.

그렇지만 잘했다. 흥분하지 않고 말투도 억양도 적당하게, 군더더기 없이 요점만 말했으니 이 정도면 범이도 내 의중을 알아차렸겠지. 그럼, 반은 성공이 아니겠는가.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화장대 앞에 앉았다. 보석함을 열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진주 목걸이를 꺼냈다. 귀걸이도 알이 제일 큰 것으로 골랐다. 머리끝은 웨이브로 힘을 주고 폴로 화이트 클래식 셔츠를 걸친 뒤 빳빳하게 깃도 세웠다. 단추는 3~4개 풀러 가슴골을 살짝 드러냈다. 바지를 입을까, 치마를 입을까 고민하다가 리바이스 501 빈티지 스트레이트 진을 선택했다. 아주 마음에 든다. 나는 안방을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탁탁 앞치마를 털어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군장을 메듯 허리띠를 꽉 졸랐다. 오늘 저녁은 범이가 좋아하는 목살 스테이크 카레다. 마음이 힘들 때면 함께하는 비비안웨스트우드의 클래식 진주 목걸이와 15mm의 눈동자만 한 담수 귀걸이는 오늘도 내가 기품과 우아함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이 돼줄 것이다.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소서.’

저녁 준비를 위해 도마 위의 야채를 타다닥타다닥 채 썰어 내면서 나는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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