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 전개 위기 절정 도망 결말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학생일 때 학교가 싫었다. 핀란드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는 핀란드가 싫었다. 대학원생일 때는 연구실이 싫었다. 취직을 한 후에는 회사가 싫었다. 어찌나 까탈스러운지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내가 있는 장소들이 싫을지 모를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름의 애정을 가지고 발 딛고 있는 장소에서 생활하는데 나만 그러지 못한 채 그 장소들을 떠나고 싶어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겉도는 느낌이 들고 혼자 보내는 시간조차 답답해서 곤욕이었다. 그동안 마음은 지옥이었다. 평화로운 풍경과 사람들의 분주한 일상들, 그것들이 나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희미한 웃음만을 얼굴에 띄우고 이유도 모른 채 속은 썩어만 갔다. 현재 있는 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간다면 이 갑갑증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매번 했지만 바람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긴 시간 동안 편안한 공간을 찾지 못했다면 단순히 공간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내 공간이란, 아니 내 자리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일까. 이번 생에 내 자리란 주어지기나 한 걸까. 계속되는 방황에 부정적인 결론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있는 곳이 싫었던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에서의 모습이 싫었다. 공부 못하는 내가, 영어 못하는 내가, 연구 못하는 내가, 업무 못하는 내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잘하지 못하는 걸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가 그렇게 싫었다. 단점과 한계를 반복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상황이 싫은 걸, 장소가 싫다고 느꼈다. 이곳에 있지 않았으면 부족한 모습을 몰랐을 텐데 하며 장소를 탓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니깐, 투덜거리다가 그냥 그곳을 홀연히 떠나버리면 그만이니깐. 하지만 회사원이 된 마당에 20살 대학생처럼 도망칠 곳이 있지도 않고 갑자기 떠나버릴 용기도 희미해졌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장소를 바꾸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데 상황은커녕 공간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 애정을 가지고 살아갈 곳을 찾아 정착해야 하지 않을까.
어느 날, 이곳저곳을 흘러 흘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도망기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몇 명의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고 그건 도망이 아니지 않냐며, 오히려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말해주었다. 의아했다. 그들과 내가 말하는 용기가 다른 것 같았다. 나에게 용기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무엇이든 끝까지 해낼 수 있는 끈기와 집념이었다. 나에겐 그 ‘용기’가 없었다. 대신 내가 있는 장소를 그저 떠나버릴 ‘알량한’ 용기만 있었다. 나는 도망자인가 여행자인가 생각해본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여태껏 정착할 낙원을 찾지 못한 이유가 도망 때문이라면 이제 도망은 그만둬야 할 텐데... 계속해서 헤매고 있는 과정을 도망이 아니라 여정이라고 여긴다면 낙원을 찾을 수 있을까. 앞으로 얼만큼이나 더 헤매고 괴로워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