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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아 Apr 29. 2022

시간을 달리는 소녀

후회와 미련, 과거에 대하여


예전에는 타임머신을 타고 후회하고 있는 사건들을 되돌리고 싶었다. 순간의 선택들로 결정된 나의 현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재 모든 고통의 원인은 과거의 선택들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바꾸고 싶은 과거를 상기할 때마다 자괴감과 창피함이 몰려왔다.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의 나보다 나은 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거의 나에게 이미 한 선택을 부정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결과를 알아도 그 길을 선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의 내가 내린 선택들은 그때 당시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과거의 나를 존중하고, 나의 선택을 사랑하기로 했다. 점차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욕망은 잊혀 갔다.




다른 이유로 타임머신 생각이 다시 절실해졌다. 항상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지만, 행복한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나 감각들과 디테일이 잊힐 때마다, 뒤늦게 행복한 감정을 깨달을 때마다, 타임머신이 있어서 그 순간을 여러 번 되돌려보고 싶었다. 시간의 유한함에 대한 걱정은 행복한 순간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했다.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들이 차고 넘쳤다.




이미 생겨버린 후회가 한가득이었는데, 더는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 안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느끼려고 했다. 감각을 깨우고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걸 매 순간 인지시켰다. 우리 집 식탁에서 바라본 하늘의 모습이나, 가을 냄새, 버스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 행복한 순간들은 가까이에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기 때문에, 안녕을 말할 수 없는 순간도 많았다. 이 사실들을 떠올리자 지금 앞에 있는 사람들이 소중해졌다. 나의 모든 순간과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기로 했다. 그러자 후회는 예전보다는 덜해졌다. 사실은 아직도 그리움과 아쉬움에 애달파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과거를 바꾸거나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은 잠재웠지만, 타임머신에 대한 생각은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과거의 내가 상처받은 처량한 모습으로 문득문득 찾아왔다. 아직도 과거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해결하지 못한 일들과 감정이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 앞으로는 괜찮아질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때 처한 상황은 다 내 탓이 아니라고, 그저 운이 없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타임머신이 없었다. 나의 위로는 나에게 닿을 수 없었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상처나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힘들어하는 원인이 해결돼서 하루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도 아닌데 그들의 고민과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는 건 의례적인 일이었다. 왜 그럴까? 그들은 이따금 찾아오는 과거의 나와 닮아있었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고,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온 듯했다. 그럴 때면 용기를 내 다가가 이미 지나온 길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그들에게 전해 본다. 그 말은 그들에게 전하는 얄팍한 위로이자, 지나온 과거를 잊고 앞으로는 다르게 살겠다는 선언이자, 동시에 과거의 나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타임머신이 없어도 나에게 닿을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과거의 나와 그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가능성도 없는 타임머신 생각은 이제 그만하고.




이제 지나간 시간을 붙잡지 말자고 다짐한다. 잡히지도 않는 시간을 붙잡으려 노력하지 말고 현재에 더 집중하기를, 모든 것에 더 애정을 실어보기를 택했다. 뒤를 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다. 이제는 시간을 거스르길 바라기보다는 앞을 보고 달려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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