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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아 May 03. 2022

지금, 진짜로.

고통과 함께 찾아온 행복 느끼기

#살고 싶지는 않은데 행복은 하고 싶어





왜 사는 거지라고 내면에서 의문을 던질 때가 있다. 마음속에 파문을 이는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었고, 답을 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려는 건지 의문은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어렸을 때는 이럴 때마다 살기 싫어졌다. 죽고 싶었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다 포기해버리고 싶었다. 깊은 무기력함이라고 하면 좀 더 잘 설명되려나. 그때는 인생에서 붕 뜨는 기분을 어찌할지 몰라 난감했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불청객 같은 의문이 아니더라도 평소에는 걱정과 불안이라는 객식구와 함께 살았다. 행복하면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행복이 언제 달아날까 두려워했다. 행복의 대가로 언제 불행해지려나 불안해했다. 마치 형벌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행복의 끝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어서 불행해지라고.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행복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으리라. 그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상실감과 허무함에 힘들어할 나를 위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미리 근심하고 있었다. 다만 예방 주사를 너무 호되게 놓은 나머지, 예방하려는 병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심연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행복은 참으로 멀고도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바라는 행복이란 즐거운 기분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 이 모든 기저에 깔린 어두운 감정이 몸과 마음에서 비워진 상태였다. 완전한, 행복 그 자체. 이를 위해 걱정과 근심을 하나씩 없애려고 했고, 어둠도 걷어내려고 부단히 노력해봤다. 그러나 이것들은 회전문과 같아서 하나가 가면 또다시 오고, 마치 나에게는 우울과 불행의 총합이 정해져 있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모든 시간이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슬픔이 다가오지 않게 내디뎠던 한 걸음 한 걸음들로 가끔 생의 반짝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둡고 끈적끈적해서 쉬이 지워지지 않는 감정들을 깨끗하게 지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완전한 인간이 느끼는 감정에 완전함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면 나는 섬세하고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감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쉬이 지나갈 그런 일들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고통에 대한 역치가 상당히 낮았다고 할까. 사실 생각해보면 고통과 행복은 항상 동일한 방향에서 찾아왔다. 고통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는 감각은 동일했기에. 때문에 이퀄라이저 설정에서 각 변수를 조절하듯이 고통의 역치는 높이고, 행복의 역치는 낮출 수는 없었다. 고통의 역치가 낮은 나는 행복의 역치도 낮기 때문에 행복도 더 자주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내가 고통에 압도되어, 고통과 함께 찾아온 행복을 모르고 있었다. 결국 내가 바라는 행복이란 닿을 수 없는,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이상의 상태였다. 불행과 행복은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도 100퍼센트의 순수한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행복이란 불행을 쫓아내고, 평화로운 순간에서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와중에도, 길을 잃은 와중에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나와 줄곧 함께 있었다.





#Carpe diem





고통과 함께 찾아온 행복은 어디에 있었는지 떠올려본다. 집에서 바라본 풍경이나, 회사 점심시간에 올려다본 청명한 하늘과 온화한 날씨, 퇴근 후 거실에서 조명을 켜고 시간을 보냈을 때 행복했다. 이러한 소소한 시간과 행복들은 늘 도처에 깔려 있었다. 고통을 느끼는 만큼 행복을 느끼게 감각을 깨우면 되는 일이다. 행복은 감각에서 왔다. 냄새, 풍경, 맛, 멜로디, 바람. 나와 내 주변에 집중하면 언제든 행복해질 수 있었다. 나에게 다가온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멀리 보기보다는 가까이 보기를 선택했다. 감각을 깨우고 순간에 집중하기로. 완전한 순간, 완전한 현재란 있을 수 없기에 순간에 몰입한다는 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감각을 깨우고 순간에 몰입하는 일이 누구나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적이 있다.


“너처럼 그렇게 환하게 웃은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어.”


어느 날 친구가 웃고 있는 나를 보면 한 이야기이다. 이런 말을 한 친구보다 내가 직면한 문제들이 덜하거나 가볍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나는 근심 걱정을 달고 살았더라도, 행복한 순간에는 불운한 모든 것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일순간 웃을 수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 순간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실도피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들을 온전하게 표현하는 일도 순간에 집중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결실이었다.





#지금, 진짜로





순간들을, 감각들을 느끼려는 나의 발걸음들로 의문은 이전과는 다른 무게로 찾아온다. 이전에는 무기력으로 압박했다면, 이제는 불만족스러움으로 날 덮친다. 어느 쪽이 더 무겁고 버티기 힘든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나에게 물어본다.



지금,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숨어있는 욕망과 욕구를 찾아야 했다. 번잡스럽고 복잡한 세계에서 작게 들리는 나의 소리는 나만이 들을 수 있기에 집중해야 했다. 바라는 바를 남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내가 알아봐 줘야 했다. 나에게로 향하는 모든 행동은 행복함의 시작이었다. 여전히 비교하고, 방황하며, 넘어질 때도 있지만 이 방법으로 한 층 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지금, 진짜로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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