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하더라도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부모님과 같이 살 때는 익숙한 우리 집 향이 나에게도 배어있어서, 이 향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기숙사 생활을 거쳐 자취를 시작하게 된 나에게는 더 이상 우리 집 향이 나지 않았다. 몇십 년간 맡았던 향이 사라진 후, 체취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나의 향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심지어는 나의 존재도 점점 희미해진다는 느낌까지도 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생긴 향수들로 우리 집 향이 빠져나간 빈 곳을 조금씩 채우게 되었다. 한 번 두 번 뿌리다 보니 습관이 들어 이제는 향이 나지 않는 상태가 되면 벌거벗은 듯한 느낌까지 들게 했다.
사용하던 향수가 밀폐가 잘 안 되었는지 볼 때마다 성큼성큼 줄어들어 결국 다 날아가 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시간이 되면 향수나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차에 기회가 생겼다. 독서 모임에서 친해진 지인과 우리 둘 다 최근에 관심이 생긴 향수 만들기를 하기로 했다. 여러 업체를 물색하던 중 결과적으로 우리는 ‘푸르스트’를 선택했다. 혜화, 한옥, 향수. 완전 환상의 조합이었다. 십 년 만에 찾아간 혜화에서 어떤 향을 만들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이미 만들어진 향수 중에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베이스부터 선택해서 원하는 향들을 조합한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런 체험의 난감한 점은 최상의 결과를 얻고 싶다면, 원하는 게 뭔지 먼저 나를 탐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두루뭉술하더라도 최소한 윤곽은 잡아놓고 가야 최종 결과물이 불만족스럽게 나오지는 않았다. 다른 카테고리의 체험이라면 검색이라도 해서 대충 감이라도 잡겠는데 향이라는 게 자료 조사로 내 선호도를 알기 어려운 분야였다. 향에 민감하긴 했지만, 향기라는 카테고리에서 원하는 향이나 향으로 불러일으키는 기억은 없는 편이었다. 물론 음식 냄새나 악취와 관련해서는 말할 게 있지만 향기는... 정말 없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쓸만한 방법이 있다. 바로 소거법. 향에 관한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보니 우디와 스파이시한 계열의 무거운 냄새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대학원생 시절 이쪽 계열의 향수를 가끔 뿌리는 선배가 있었는데, 내가 느끼기에 그 향은 무겁고 진한 향이어서 맡으면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향이었다. 그래서 선배가 그 향수를 뿌리고 오는 날에는 선배를 냄새꼬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포켓몬)이라고 놀렸다. 여기에다 추가로 남자 스킨 향. 아버지가 바르는 스킨에 주로 나는 냄새였는데, 이 향이 주는 거부감이 있어 맡을 때마다 속이 좋지 않았다. 우디, 스파이시, 남성 화장품 향. 주로 이런 향들은 내가 불호하는 향이었다. 역시 호보다는 불호를 찾는 게 더 쉽고 빨랐다.
오랜만에 도착한 혜화는 평화로웠다. 강남이나 성수처럼 북적거리지 않고 그냥 평화로웠다. 바람은 많이 불었지만, 날씨도 따뜻하고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날씨였다. 이런 날씨와 분위기를 빌려 신나는 마음으로 골목에 위치한 프루스트로 향했다. 골목 입구에서부터 발견한 한옥 지붕만 보아도 설레었다. 나의 마음을 들뜨게 한 지붕 아래는 통유리로 되어있어서, 유리 벽을 넘어서 공방 내부 향이 입구에 도착한 나에게로 마중 나온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
향수 만들기의 시작은 7가지 베이스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이었다. 향을 맡으면서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우디는 생각보다 그리 거부감이 드는 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 상상 속에 우디는 '우디!!!!!' 하면서 강력한 느낌이었는데 베이스에 있는 우디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이미지가 좋아진 우디를 뒤로 하고 나에게 익숙한 꽃향기를 베이스로 선택했다. 베이스를 고른 뒤, 조향사님에게 어떤 향을 원하는지 말하면 베이스로 고른 향과 어울릴만한 향료들을 몇 가지 꺼내 주었다. 지인은 자연의 냄새를 좋아한다고 했고, 나는 꽃향기이나 달콤한 향을 주로 썼다고 말했다.
원하는 향을 찾기 위해서 서로 다른 향들을 맡아보는데 이게 향을 묘사할 단어가 부족하다 보니 맡아도 기억이 안 나서 다시 맡아보고 또다시 맡아보고 반복하기 일쑤였다. 마치 수능 언어 지문을 읽을 때 앞에서 무슨 내용인지 잊어버려서 앞으로 다시 가서 읽고 뒤로 가다가 다시 앞으로 반복하는 모습 같았다. '어디서 맡아본 냄새 같은데...'라는 생각만 들었다. 냄새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고, 그저 익숙함과 선호도 정도만이 그 향을 맡을 때 떠오를 뿐이었다. 시각이나 청각, 통각, 미각을 묘사하는 데는 딱히 어려웠던 적이 없었는데, 후각은 정말 미지의 영역이었다.
묘사할 단어가 없다는 것도 그렇지만 각 단어에서 사람마다 떠올리는 향이 다르다는 것도 향을 상상하는 데 어려움을 더했다. 자연 냄새를 좋아하는 지인 덕분에 여러 향을 맡아봤는데 베이스에 섞을 향 중 하나를 주면서 이건 어떠냐고 물었다. 오래 생각하지 않고 향을 맡았을 때 드는 생각을 최대한 그대로 말했다.
“시원한 절간 냄새?”
이 향을 정확하게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묘사해보자면 나무 향 위에 알코올처럼 시원한 향이 덮어져 있는 향이었다. 내 피드백은 그분에게 확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마다 떠올리는 절의 냄새가 다를 테니 말이다.
수많은 후보 중에서 고른 향들을 일정 비율로 조합을 하였다. 1차로 조합한 향을 섞고 한 번 맡아봤다. 무슨 향인지 잘 설명할 수 없었는데 조향사님이 맡더니 풍선껌 향과 꽃향기가 난다고 했다. ‘아, 이게 풍선껌 향이구나’ 싶었다. 2차 조합 때는 다른 비율로 조합해보았는데 2번째가 좀 더 마음에 들었다. 1차 때 보다 덜 달고 시원한 향이 나는 꽃향기가 났다. 향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서 좋았다. 향으로 마비된 코를 비비며, 만들어진 향수를 조향사님에게 건넸다. 향수병에 향수를 옮겨 담고 밀폐될 수 있게 특이한 도구로 힘을 주어 뚜껑을 닫아주셨다. 왠지 오늘의 기분 좋은 경험이 이 향수와 함께 포장된 것만 같았다. 향수는 숙성 과정을 통해 알코올 향은 날아가고 부드러운 향을 얻을 수 있게 2주 뒤부터 사용하며 된다고 하였다. 기다림이 필요한 과정이었다.
다음 날 참지 못하고 바로 사용해봤는데 향이 아주 마음에 든다는 지인의 말에 결국 나도 포장을 풀러 향수를 뿌렸다. 향을 계속 맡다 보니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숨겨져 있던 기억 저편의 내용을 꺼내어 어렵지 않게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비누 향이었다. 집에서 쓰던 비누 중에서 꽃냄새가 나는 비누들이 있었는데 그 향이었다. 은은하게 나는 꽃향기. 그래서 이 향을 맡을 때마다 뽀송하고 상쾌한 느낌을 받았다. 부담 없이 자주 뿌릴 수 있는 마음에 드는 향이긴 했지만, 우리 집 비누 향을 육만 원이나 주고 산 꼴이 되어 실소가 나왔다.
향수를 만들기 전에는 쓰던 향과는 다른 향을 찾으려고 했다. 향으로 손쉽게 변화를 주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항상 이런 체험(전문가에게 의탁해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는 맞춤형 체험)을 하기 전에는 새로운 내가 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었다. 180도 달라진 모습을 원하지만 결국 보면 360도 달라진, 그러니깐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변신이나 변태를 바라지만 끝에 얻게 되는 것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에 대한 발견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고 유에서 무로 바뀔 수 없듯이 새로운 것은 없었다. 그저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인지하게 되는 여정이었다.
숙성이 덜 된 향수에서 나는 향을 맡아본다.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져 버리고 좋아하게 된 비누향을 닮은 향수라도 체온과 체취와 섞이면 내가 알던 그 향과는 조금 다른, 나만의 향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미완의 향수는 시간이 지나 어떤 향을 낼까. 이 향을 쓰는 나는 어떤 향이 나는 사람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