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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영 나영

by 개울건너


막내오빠 빈소에 사부인이 찾아주셨다.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 나누던 중에 아들이 “엄마는 외할아버지,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올라?”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을 얼른 찾지 못했다. “으응.. 외할머니한테 자주 혼나고 자주 주무시던 생각.”

나는 앗차, 싶었다.

“주무셔두 신문이나 책을 보시다 주무셨지.”

급한 수습이 어설퍼 엉켰다.

이게 아닌데, 점잖으셨는데.. 풍채 좋은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늘 옷을 잘 입혀 내보내 기품 있었는데.. 해마다 구정 때 한복 입고 윗방에서 점잖게 가래떡을 썰던 모습도 자애로우셨는데.. 아침저녁으로 늘 성호를 긋고 기도하셨는데..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아들이 야속했다. 쟤는, 사부인 앞에서 그 질문을 할 거라고 미리 귀띔을 좀 해주지, 그러면 아버지와의 따뜻했던 기억을 미리 생각해 뒀다가 꺼냈을 텐데..




아버지의 유년 시절은 알 수가 없다. 제천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외에는.

그러니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첫사랑의 추억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이야기만 알고 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계시던 십 대에 제천 큰 집에 내려갔는데 어느 해엔 큰집에 가니 큰어머니가 콩밥을 해주셨다고, 아버지가 콩을 싫어해 콩 먼저 얼른 먹어버리니 큰어머니가 "네오(아버지 세례명) 콩 좋아하는구나" 하시며 콩을 또 많이 밥 위에 얹어주시더란 이야기를.


부모님을 중매한 분은 고향에서 한약방을 하던 아버지의 백부였다.

그분이 아버지를 소개해 부모님이 부부로 맺어졌다. 어머니가 첫사랑과 파혼하고 얼마 후였는지는 모르겠다.

중매하신 그분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누워 계실 때 와서 침놓고 약을 지어주셨던 분이기도 하다.


스무 살에 외갓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회계 일을 보며 몇 년 지내다가 서울에 둥지를 튼 동네가 남산 아래였다.

부모님은 외가의 옹기공장에서 옹기를 받아다 인현시장에 옹기 전을 내셨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아버지의 군 징집 명령을 피해 부모님은 다시 외가 동네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외갓집에서 잠시 회계 일을 또 보셨다.

큰언니가 어릴 적, 친구들과 소꿉장난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읍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언니를 뒤에 태우고 집으로 들어갔다. 언니는 그때 자가용을 탄 것처럼 친구들에게 자랑스러웠단다.


몇 년 후 부모님은 외가 동네에서 꽤 떨어진 동네로 들어가 다시 옹기장사를 시작했다.

마당 넓은 한 주인집에 들어가 마당에 옹기를 쌓아놓고 방 하나에 기거하며 매일 리어카에 옹기를 싣고 주변 동네를 돌며 행상을 했다.

그 동네에 장이 서는 날이면 그곳에 가서 장을 펼치기도 했다.


우리 옆집 순이네 부모님도 같은 곳에 나가 장사를 했다. 그분들은 일 년에 옹기를 두 차 팔았고 우리 부모님은 서른 차를 팔았다.


아버지는 적극적인 어머니에 비해 수동적이었다. 어머니 말을 잘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다가 동생들을 봐야 해서 학교를 그만둔 어머니에 비해 중학교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늘 신문을 보셨다.

비 오는 날엔 부모님은 장사를 나가지 못했다. 그런 날에는 아버지가 주인집 학생과 그 동네 학생들에게 한문을 무료로 가르쳐 주었다.


부모님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오셨다.

우리 세 자매는 저녁에 아버지 곁에서 서로 아버지 팔베개 하고 자겠다고 다퉜다. 나는 아버지가 들어와 마루에 앉자마자 아버지 팔베개를 먼저 맡아 놓아 아버지 곁을 놓치지 않았다.


부모님이 집에 오시면 어머니는 집에서도 늘 일을 하셨다. 마루도 방도 부엌의 무쇠 솥뚜껑도 반짝반짝했다.

어머니가 마루를 닦으며 소리 질렀다. “주막에 가서 아버지 얼른 오시라고 해라.” 즐거운 심부름이다.

나는 움(옹기 가마) 옆 고개를 넘어가 얼마 전 제 엄마가 장에 간 사이에 일어나 아장아장 걸어가 엄마 찾다 집 옆 웅덩이에 빠져 막내 여동생이 죽은 창남이네 집을 지나, 몇 년 후에 큰오빠와 좋아 지낼 진희언니네 꽃 마당 앞을 지나 주막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얘기 중이다가 내가 들어가면 거기 과자를 집으라고 했다. 나는 뻥 과자 봉지를 집어 들고 뜯어 양 열 손가락에 끼워 넣고 입으로 빼먹었다.



구정 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새로 지은 한복을 입히셨고 형제들에겐 새 옷과 새 양말을 신겼다. 설날에 우리 집은 풍성했다. 부모님이 오실 때 가지고 온 갱엿, 강정, 집에서 만든 감주 떡과 만두 등.

아버지는 윗방에서 가래떡을 썰었다. 어느 때는 다 썰어놓고 동네로 나가셨고 어느 때는 먼저 나갔다가 들어와서 떡을 썰어놓고 또 나가셨다.


정월 대보름 무렵이면 아버지는 문창호지로 햇빛이 환히 들어오는 건넌방에서 우리 집에 놀러 온 어머니 친구들의 토정비결을 봐주기도 했다. 책을 펴놓고 금례어머니의 올 한 해 운세를 읽어주니 ‘내가 올해 죽을 운세인가벼!’하며 한숨 쉬었다.

금례 어머니가 그녀의 자식들도 봐달라고 이름을 줄줄 대서 아버지가 조금 귀찮아하며 봐주셨다. 올해 자기가 죽을 운인가 보다고 그때 한숨지었던 금례어머니는 25년을 더 살았다.

이렇게 반복되는 삶이 내가 중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부모님은 서울로 이동하셨다. 넓은 터에 옹기 도매상을 차려놓고 천막으로 지어놓은 숙소 안에서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신문을 읽으셨다.



아버지는 가끔 혼자 영화구경도 가셨다. 오빠가 아버지는 멋을 아는 분이라고 했다. 나도 뚝도 극장에 아버지와 같이 간 적이 있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성냥, 라이터 돌, 담배등을 사러 가끔 다니던 길 건너 경창상회 초로의 부부가 몇 달 사이로 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그 부부는 살아서도 정이 좋더니 가는 것도 같이 갔다고 말했다. 나는 어머니한테 자주 혼이 나는 아버지는 나중에 경창상회 부부처럼 어머니와 몇 달 사이 같이 가시려나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따로 가시려나 잠깐 생각했다.




아버지의 제일 큰 사촌형의 환갑이라고 했다. 부모님을 따라 기차를 타고 제천에 갔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 타고 가서 산동네로 걸어 들어갔다.

안양, 용인 서울 등에 살고 있는 친가 쪽 사람들이 많이 와있었다.


밤이 되어 그곳에 온 많은 손님들과 같이 자던 중이었다.

한쪽 다리가 꽤 안 좋은 그 집의 셋째 아들이 그의 아내를 불러냈다. 그녀가 나갔고 잠시 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들이 일어났고 아들을 그의 아내에게서 떼어냈고 그러느라 집안이 시끄러워졌다.


다음 날엔 환갑을 치렀다. 자식들이 제천아저씨에게 절을 했고 음식을 먹었고 집안 대사진도 찍었다.





결혼하면 부모님과 함께 살 나의 넷째 오빠가 군에서 제대했다.

강남이 영동으로 불리던 시절, 영동 개발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그곳에 개나리 아파트 경복아파트가 지어졌고 공터에서 주택이 지어지고 있었다. 14번 버스는 은마 아파트를 짓는 노동자들을 가득 싣고 달렸다. 오래된 주택들은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곳에서 꿈틀대는 돈의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곳에서 이십 대 젊은 부동산중개인들이 사무실을 열어 돈을 벌기 시작하고 있었다. 늘 신문을 보시는 아버지는 시대를 잘 읽었다.

아버지는 뚝섬 우리 집에서 오빠에게 이 강 건너 저곳에 가서 복덕방 일을 배우라고 했다. 시대를 읽을 리 없는 어머니는 무슨 복덕방에 얘를 내 보내느냐고 했다.




여름방학이면 제천에서 보았던 넷째 오빠가 집에 놀러 왔다. 그는 혜화동에 있는 대신학교 학생이었다. 그를 볼 때마다 한 밤중에 아내를 불러내 때렸던 그의 셋째 형 소식이 궁금했다. 물론 물을 수는 없었다.

나는 오빠와 내가 몇 촌인지를 물었다. 그는 아버지끼리 사촌간이니 우리는 육촌간이라고 말해줬다.

그는 집에 있는 기타를 둥둥 치기도 하며 지내다 갔다.





사회적으로 성공은커녕 조금도 피지 못한 자식들을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자식들 다 바보 만들었다고.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또는 중퇴하고 아무것도 없이 서울 올라와 혼자 떠돌다 어찌어찌해 잘 살고 있다는 고향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부모가 무능한 것도 자식 자립엔 괜찮은가 보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돼서도 영육으로 부모 그늘을 아무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형제들을 생각하면.


나무가 크면 그늘도 크다는 옛말도 생각했다.




아버지의 단 하나의 형제인, 아버지와 나이차가 많은 작은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셨다. 포클레인 기술을 다 배워서 포클레인을 사야 하는데 우리 집 담보로 보증을 서 달라고 했다.

가장이 보증을 잘못 서 있는 재산을 다 날린 집이 허다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나서서 말했다. 난 죽을 때 한 채 있는 집이나 뒤집어쓰고 죽을란다고.

작은 아버지가 벌떡 일어섰다. 이 집 구 남매 다 뚜디려 뭉쳐야 내 아들 하나만 못하다는 말을 던지고 나갔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다음 명절부터 작은 어머니가 고달파졌다. 어머니는 무슨 핑계를 대서든 “자네 이리 좀 들어와 보게!” 하곤 작은 어머니를 안방으로 불러 앉혀놓고 혼을 냈다.

작은 어머니는 그렇다고 명절에 안 올 수도 없었다. 안 오면 안 온다고 어머니가 더 혼을 내니까. 명절 때 우리 집에 들어서는 작은 어머니 얼굴은 늘 우울했다.


친가 쪽 육촌 큰일에 어머니도 늘 참석했다.

혼자 힘으로는 어머니를 못 이기겠는 작은 어머니가 그쪽 여인들과 한 편이 돼 은근히 어머니를 따돌렸다. 사촌 손윗동서가 되는 그쪽의 한 여인이 어머니에게 동서노릇을 하며 한 소리 했다.

그 후로 어머니는 친가 쪽으로 발길을 끊었다.


작은 어머니를 보호해 줄 여인들이 없는 명절에 작은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어머니에게 더 시달렸다.


친가 쪽 큰일에 아버지 혼자만 다녔다.




우리 형제가 다 결혼했다.

아버지 생신이 여름에 들어있다. 늘 그랬듯 부모님 모시던 오빠 내외가 주선해 우리 가족은 천진암 계곡으로 나갔다. 주문한 닭백숙을 먹었다.

노래시간이 되었다.

고등학생인 한 조카가 얕은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서서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았다.

조카들이 물에 발을 담그고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가족들과 넓적한 바위에 앉아 안고 있는 작은 아이의 양손을 잡고 아가 손뼉을 쳤다.

다섯 살 나의 큰 아이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때 한창 유행하던 김민우의 ‘사랑일 뿐야’를 김민우와 똑같이 불렀다. 목소리만 아이일 뿐.

가족들이 놀라 소리치며 오래 손뼉 쳤다. 앙코르를 외쳤다.


어머니가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마이크가 갔다.

노래를 잘 못하시는 아버지는 늘 그렇듯 무얼 부를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늘 그렇듯 어머니가 말했다. “그거 불러유 그거!”

한 올케언니가 아예 그거 그거를 선창 했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 운다”

모두 같이 물렀다.

“너영 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참사랑이로구나..”

나는 안고 있던 작은 아이를 옆 올케언니에게 안기고 일어섰다.

넓은 바위 위에서 덩실 춤을 추었다.

나머지 세 자매가 모두 일어났다. 덩실 춤이 푸짐해졌다. 올케언니들이 웃으며 계속 불렀다.

“백록담 올라갈 땐 누이 동생 하더니 한라산 올라가니 신랑 각시가 된다

너영 나영 두리둥실..”





아버지가 근처에 짓기 시작한 천진암 성지를 둘러보러 일어나셨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같이 걸었다. 성지를 둘러보니 아직 가건물만 들어서있고 황량했다.

아버지는 여기가 백 년 동안 지을 성당이라고 일러주었다. 아버지도 나도 생전엔 완공을 못 보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언덕을 오르며 아버지 자리는 외로운 자리지라 했던 오빠의 말을 그저 떠올렸다.




아버지가 연세가 많아지며 부모님을 대신해 부모님을 모시던 오빠가 친가 쪽 큰일에 빠지지 않고 다녔다. 제천, 안양, 용인의 육촌 형제들과의 유대가 끈끈했다. 오빠는 친가 쪽 뿌리를 귀중히 생각했다.





아버지 생신 때면 여기저기 겹치지 않고도 가까운 계곡으로 다녔다. 그 사이에 셋째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대가족은 또 백숙을 먹었고 두릅 구이를 먹었고 불고기를 먹었다. 그렇게 수년을 지냈다. 그 사이에 큰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연세 칠십 대 중반이 되었다. 치매가 시작되었다.

새벽마다 보시던 신문을 보지 않고 얌전시리 접어 문갑 서랍에 넣었다 뺐다 했다.

큰 달력 메모 칸에 ‘이발한 날, 00 여식 결혼, 전기세 내는 날’ 적어 넣던 메모도 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문갑 서랍에 넣던 신문은 넣지 않고 빈 서랍만 열었다 닫았다 했다.

아버지에게 이젠 신문이 필요 없어 새벽마다 배달되는 신문을 끊었다.

아버지는 오빠 차에 어머니와 함께 타고 가게로 출근해서 누워 주무시며 어머니의 병시중을 받으셨다.




와보라는 오빠의 전화를 받고 부모님 댁으로 갔다.

올케언니가 쑤어다 준 죽을 누워계신 아버지 입에 넣어드렸다.


신부님이 오셨다.

신부님은 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주셨다.

기도가 끝나고 신부님이 성호를 긋자 아버지도 성호를 그으려고 오른손을 올리려 했으나 손끝만 움직일 뿐 팔이 올려지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 성호 그으시려는데 안 되네” 했다.


나는 집으로 다시 왔다.

밤에 잠깐 잠이 들었다. 친정집에서 왕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사람들이 밥상을 거실로 가져다 펴고 있었다. 번뜩 눈을 떴다. 아버지가 임종하시나 보다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 임종 중이라고.

택시를 타고 친정집에 도착하니 누워 계신 아버지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큰 언니가 곁에서 임종경을 읽고 있었다.

둘째 오빠가 들어왔다. 나는 아버지에게 둘째 오빠 왔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머리를 돌려 문 쪽을 돌아보더니 오빠를 보시곤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크게 내 쉬곤 떠나셨다. 아버지 연세 팔십 세였다.



작은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무릎을 꿇고 두 팔을 짚고 상체를 숙이고 울었다.

장례는 집에서 치르기로 했다.


아침이 밝자 작은 언니가 도착했다.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와보지 못했던 언니는 “이게 뭐야 이게 뭐야”하며 통곡했다. IMF 징조가 시작되던 때였다. 썩 잘 되진 않던 가게였지만 더 나락으로 떨어진 때였다. 언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등록금도 버거워했다.


조문객들이 모여들었다.

사십 대 초반의 한 신부님이 오셨다. 그는 친근하게 아버지가 그의 당숙이라고 말했다. 작은 방에서 우리 가족 한 명 한 명 에게 고백성사를 주었고 위로해 주었다.

그때까지 나는 아버지의 조카 신부는 신학생 때 우리 집을 다니던 요셉오빠뿐인 줄 알고 있었다.

그가 요셉신부는 지금 미국에 있어서 못 나온다고 했다.


다음 날 많은 수의 남자 어른들이 한꺼번에 조문을 왔다. 친가 쪽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사촌 형제들이었고 그들의 자식인 나와 육촌 형제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날 밤에 같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잤고 장지까지 모두 함께 갔다.

나는 친가 가족들의 이런 행동 들에서 어떤 품격을 느꼈다. 묵직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떠나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예우를 다하는 그들의 모습이 감동스러웠다.

그들을 부모님을 모시던 오빠는 잘 알고 가까웠으나 나는 누가 누군지는 잘 몰랐고 멀리서 그들의 품위만 느낄 뿐이었다. 그분들의 얼굴이 내 아버지와 닮아있다고 느낄 뿐이었다.

제천 아저씨 환갑 때 그날 밤 부모님과 중학생이던 나와 다 같이 거기서 잤고 같이 먹고 했던 분들이겠지만 나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산에 아버지를 잠재워드리고 귀가하는 버스에 다시 올랐다.

우리 네 자매는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작은 언니가 말했다. “나 내 설움에 울었어.”

옛 말에 초상집에서 내 설움에 운다는 말이 맞긴 한가보다.

십 년 뒤 어머니가 떠나셨을 땐 언니가 남의 초상집 온 것처럼 민둥민둥했으니까. 유족실로 먼저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으며 입고 나온 옷이 맞지 않아 불편하다는 말을 먼저 했으니까.

그땐 언니의 아이도 대학교를 다 마치고 힘든 터널을 다 빠져나와 있어 한 숨 돌리던 때였다.






아버지 삼우제를 끝내고 산에서 내려와 식당에 들어갔다.

작은아버지가 너희들은 형제가 많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나 죽어 쟤 혼자 초상 치를 생각을 하면 걱정이라고 말했다. 나 죽거든 잘 부탁한다며 눈물지었다.

큰언니가 제 사촌 형 누나들이 이렇게 많은데 무슨 걱정이냐고 작은아버지에게 말했다. 오빠들이 작은 아버지 아무 걱정 마시라고 했다. 작은 아버지 떠나시면 우리가 쟤 혼자 일 치르게 두겠느냐고.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오빠들이 나서서 사촌동생을 도와주었다.


여러 해가 또 지났다.


육촌 큰오빠가 돌아가셨단다.

부모님을 모시며 오랫동안 친가 애경사에 빠짐없이 다니던 오빠도 떠났으니 그 오빠를 대신해 다니고 있는 막내오빠 차에 나도 같이 타고 제천으로 출발했다. 이젠 나도 집안 애경사에 다녀야 할 것 같은 책무감이 어느새 자리했으므로.


그곳에 들어서 입구에 서있는 남자에게 아버지 성함을 대고 우리를 소개하니 그가 “아아 뚝섬 아저씨 가족이네!” 하고 그는 우리를 분향소로 안내했다.

아버지가 뚝섬에서 옹기 도매상을 했었기에 제천서는 아버지가 뚝섬아저씨로 불리고 있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뚝섬 아저씨’라는 호칭이 생전의 아버지처럼 자애롭게 다가왔다.


우리를 안내한 사람이 자신은 고인의 막냇동생 요한이라고 소개했다.

분향을 끝내자 그는 그의 칠 남매 중 세상을 뜨고 남아있는 형제들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상복 입은 한 여인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 아버지 떠나셨을 때 그녀가 왔었다고 말했다.

나는 놀랐다. 나에게 육촌 올케언니 되는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그제야 말했다. 그분이 올케언니들 중에 제일 밝아보였다.

자기 남편이 세상 떠나고 없어 남편을 대신해 간 거라고 말했다.


푸릇한 신학생 시절에 우리 집을 다녔던, 우린 육촌간이라고 기타를 둥둥거리며 일러주었던, 아버지 세상 떠나셨을 땐 미국에 있어 오지 못했던 요셉오빠는 은퇴신부가 되어 일어나 주름진 얼굴로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혈육이 이래서 좋다. 긴장하며 예의를 다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니까. 만났다 헤어지고 나서 실수한 언행은 없었을까 조심스레 반추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요한에게 우리가 그동안 서로 다니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얘기했고 요한은 이제라도 서로 연락하며 지내자고 말했다. 우리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니까.



이동경로나 정황 등을 되짚어 봤을 때 우리가 무명 순교자 집안으로 추측된다고, 김 씨 집안에 성직자 계보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그가 알려줬다.

우리 윗대에 신부가 셋, 우리 대에 신부가 둘 수녀가 셋, 다음 대에 신부가 하나, 그다음 대인 현재에 신학생이 두 명 있단다. 거기에 사돈의 팔촌까지 꼽으면 수도 없이 많다고 했다.

나는 만나본 신부 오빠 둘은 알고 있었어도 그분들 외에 신부 수녀가 그리 많은 줄은 몰랐었다.

사촌간인 나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가 제천에서 같이 자란 이유가 시흥에서 살던 윗대 할아버지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제천으로 왔기 때문이란다.

나는 우리 조상 이야기에 관심이 가서 귀를 바짝 기울이며 그에게 하는 질문이 많아졌다.


그는 삼십 년 전에,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그의 부모님과 형제들, 그다음 세대까지, 사 대의 이야기를 담은 가족사를 책으로 펴냈단다. 나는 또 놀라며 그 책이 남아있으면 한 권 달라고 부탁했다. 내 아버지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에게서 당신이 자라온 얘기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출판사에 근무하는 그가 엮었다는 책엔 그의 부모님 이야기가 제일 많이 들어있을 테고 그의 아버지 그림자로 사촌인 내 아버지의 성장 과정도 추측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 제천 식구들을 만나고 들은 이야기를 우선 짧게라도 친정 대가족 밴드에 올리고 싶어 이젠 머리 하얀 은퇴 신부 요셉오빠와 요한, 상복 입은 그쪽 올케언니들과 같이 사진을 찍었다.

문상한 때가 한가한 대낮이어서 다행이었다. 귀한 형제들과 여유 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으니까.


문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요한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생각났다. 나의 셋째 오빠 딸 하나가 수녀라고. 그래서 우리 집에서도 성직자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알고 싶어 요한에게 급히 질문만 하느라 내가 전할 말은 잊고 있었다. 앞으로 더 만나면서 차차 이야기를 나누어 가야 하리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친정 대가족 밴드에 제천 식구들을 만나서 들은 소식을 사진과 함께 올렸다.


삼우제가 며칠 지났을 무렵 나는 요한에게 만나자고 연락해 다음날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인 한정식 집에 조금 늦게 도착한 그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내가 부탁한 책부터 건넸다.


나는 얼른 안경을 꺼내 끼고 책을 열어 그의 가족들 사진을 들여다봤다. 그의 아버지 얼굴에 내 아버지 얼굴이 보인다고 하자 그와 나의 얼굴에도 서로의 얼굴이 들어있을 거라고 그가 말했다.

그에게서도 나의 아버지 모습이 얼핏 스쳤다.


이승과 저승의 혈육이 해후하듯 나는 책을 품에 안았다.

묻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나는 책을 가방에 넣었다. 이미 책이 내 안에 들어왔으니 여기선 이야기를 나누고 책은 집에 가서 꼼꼼히 읽어보리라.


우리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활발했다.

그도 안경을 꺼내 끼고 내가 펼쳐놓은 넓은 공책에 고조부모에게서 갈라져 내려온 자손들을 가계도로 그리며 설명해 줬다.

그는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바로 반응해 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꽤 비싼 메뉴를 골라 주문했다. 자기가 오빠니까 사주겠다며.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오래전에 제천에서 있던 그의 아버지 환갑 때 우리가 서로를 보았겠지만 그땐 서로 몰랐을 때였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육십여 년 만에 이렇게 처음 만난 거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울컥하며 수저를 들었다.


예전에 내 아버지 빈소를 찾았던 많은 친가 가족들 중에 그는 없었다고 했다. 그는 막내여서 친가 쪽 애경사에 자주 함께 하지 않았단다.


나는 제천 장례식장에서 미처 못 한 얘기를 했다.

아버지가 신부님 밑에서 복사 시절에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으며 둘째 셋째 오빠가 신학교에 입학시험을 봤으나 떨어져 가질 못했고 지금 셋째 오빠의 딸이 수녀라는 얘기를.

그는 나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날 때의 얘기와 두 오빠가 신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던 얘기는 그의 부모님에게 들은 기억이 있으나 오빠 딸이 수녀라는 소식은 처음 듣는다며 놀랐다.


나는 다리 아팠던 셋째 오빠의 안부를 물었다.

그가 조금 머뭇거렸다. 그 형은 서울 올라와 살다가 오래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단다. 부모님의 아픈 손가락이었다고도 말했다.

제천 장례식장에서 나에게 다가와 본인이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남편을 대신해 갔었다고 말한 여인이 그 오빠의 아내라고 말했다. 오빠가 딸만 둘 두고 떠났는데 두 딸이 잘 자라서 결혼해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칠 남매인 그쪽 형제들과 구 남매인 우리 형제들이 어려서부터 왕래가 활발했다면 김 씨 집안에 어떤 기적이 또 일어났을까 환한 상상을 같이 하며 우린 환하게 웃었고, 교류가 단절되면 서로 손해라며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다.

어머니가 시집 쪽으로 발길을 끊을 만큼 작은 어머니와 합세해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여인이 어머니의 어느 사촌 동서였을까 궁금해했다.

그는 어머니의 사촌 동서들이 많아서 누구인지 추측조차 못하겠다며 웃었다.

그 세대 분들은 이미 다 고인이 되었단다.

우리의 이야기는 단절 없이 이어졌다.


그곳에서 후식도 제공돼 커피까지 마셨다.


그가 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오래 지났다며 일어나자고 했다.

나는 준비 없던 말을 불쑥했다. 김 씨 집안의 가족사를 쓰고 싶다고.

그가 자기도 필요하면 참여하겠단다.


집으로 돌아와 그에게서 받은 책을 열었다. 사진들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유년시절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제천 아저씨 환갑 때 찍은 단체 사진에 부모님과 중학생인 내가 있었다.

부모님도 나도 지금까지 이 사진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가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책에서 일러주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천주교 박해가 막 끝났을 때 천주학쟁이라고 괄시받던 옹기 장사들에게 뒷돈을 대주었다고.

그 할아버지가 한의원을 운영하며 내 부모님을 부부로 맺어준 그분이다.

요셉오빠 사제 서품식 날 사진도 있었다. 거기에 우리 부모님과 작은 아버지 어머니도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책을 다시 꺼내 펼쳤다.


나는 지금 아버지의 뿌리를, 우리의 뿌리를, 다시 더듬어간다.


https://youtu.be/4N86O3loAKc?si=mgmIZlHl4YF2YR7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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