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자고 있는 방 침대 위로 베개가 날아들었다.
라면 반 개만 끓여달라고 여러 번 부탁하다가 결국 행동에 나선 어머니는 내가 놀라 일어난 걸 확인하고서야 기어서 다시 거실로 나가 당신 자리에 누우셨다.
어머니 부탁에 내가 알았어 알았다구! 반복하며 잠 속에 계속 있었던 모양이다.
서모 밑에서 서럽게 자란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와 결혼해 이웃동네로 가서 옹기공장을 세우셨다. 그 동네가 나중에 내 고향이 되었다.
어머니는 맏이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아기 때 겨울날 화로에 들어있던 숯불을 집어 오른쪽 손에 화상을 입었다. 오랜 치료 끝에 가운데 손가락 마디가 굽어지지 않는 장애를 입었다.
외할아버지 공장이 번성했다. 아래 지방에서 기근을 피해 올라오던 사람들이 맘씨 좋은 부잣집이라는 소문을 듣고 외갓집을 찾아오면 외조부모님은 그들을 사랑채에 들여 식사대접을 해 보내기도 하고 그 인연으로 어떤 이에게는 옹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옹기 장인이 되게도 하셨다.
미혼인 옹기 장인에게는 영세 먼저 시켜 동네 아가씨와 맺어주고 그 동네에 신혼살림 집을 내주었다. 외갓집 부엌에서 일하던 아가씨와 맺어주기도 했다.
그것이 우리 동네가 형성되는 시작점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땐 백여 호가되는 큰 동네로 번성해 있었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의 직업이 옹기장이나 옹기장사였다.
옹기 가마도 네 개로 늘어났다. 옹기장인들이 나중에 독립해 세운 공장이었다.
더러 노름꾼은 있었으나 난봉꾼은 없던 동네였다. 다른 여자를 보는 남자는 외할아버지가 동네에서 쫓아냈으므로.
어머니가 다섯 살 때였다.
어느 날 영남에서 흉년이 들어 올라온 젊은 부부가 외갓집을 찾아들었다.
외조부는 그들을 사랑채에 들였다.
얼마 후 그들에게 동네에 집을 얻어줘 살게 하고 남자를 옹기장이로 키웠다.
그들 부부가 데리고 온 일곱 살 난 아들이 요셉이었다.
어머니는 요셉을 오빠라 부르며 잘 따랐다.
둘이는 공기놀이를 자주 하며 놀았는데 요셉은 손등에서 공깃돌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가락을 위로 쭉 뻗쳐 올려 손등에 공기를 모아서 꺾기를 잘했다.
손가락이 불편한 어머니는 공기 꺾기를 잘하는 요셉이 부럽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 가끔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녀는 어머니 옆집에 살던 ‘사물이’라는 친구였다.
요셉이 십 대 때 그의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됐고 얼마 후 그의 어머니도 시름시름 앓더니 외조부에게 요셉의 장래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외조부는 그들을 외갓집 산에 묻어주었다.
외조부모는 이 선한 부부의 마지막 부탁을 내치지 않고 착하고 똑똑한 요셉을 친자식처럼 아끼며 배움의 길로 정진하게 했다.
요셉이 더 크자 외조부는 그를 대처로 보내 의학공부를 시켰다.
그 사이 사물이는 아랫말 철남이와 좋아 지내다 생긴 뱃속의 아이를 지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동네 창피하다며 맷돌로 자신의 가슴을 치고 쓰러진 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외갓집에 바느질과 음식 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서 음식과 바느질을 잘 배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타지에서 공부 중인 요셉과 편지를 나눈다거나 요셉이 방학 때 집에 오면 외조부의 눈을 피해 따로 만나거나 하진 않았지만 서로가 좋아하고 있음을 서로의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요셉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다.
외조부도 요셉을 어머니의 배필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요셉에게 어머니와의 결혼 의사를 물어 혼인을 결정했다.
외조부는 둘이 결혼하면 병원을 내주리라 마음먹었고 다음 해에 신랑 측에서 보내온 사주단자를 받았다.
이때 사물이가 등장한다.
그녀는 요셉을 만나 요셉이 어머니와 결혼하면 요안나(어머니 세례명)는 부잣집 딸이라 콧대가 높고 고집이 세서 가난하고 고아인 요셉을 무시할 거라고, 또 어머니의 가운데 손가락을 거론하며 어머니가 어렸을 때 몹쓸 병을 앓아 그리 됐다고도 말하며 둘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요셉은 동네사람 누군가에게 사물이에게서 들은 이 얘기를 하며 고민했다. 그가 고민한다는 말이 외조부 귀에 들어갔다.
외조부는 대노하며 요셉을 불러다 사주단자 가지고 당장 떠나라며 파혼을 선언했다. 그날 밤 요셉은 자기 부모 산소까지 파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요안나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고 단지 부잣집 딸 데려다 고생시키면 어쩌나 걱정에서 한 얘기였다는 요셉의 말을 외조부가 나중에 동네 사람에게서 전해 들었다.
더 많은 날이 지난 후 외조부는 “못난 놈, 와서 잘못했다고 빌면 됐을 것을.” 하며 요셉이 그렇게 떠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데릴사위로 들어와 외갓집에서 회계를 맡았다.
몇 년 후 부모님은 시부모님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남산 아래에 둥지를 틀고 인현시장에 옹기전을 냈다.
큰언니와 큰오빠를 낳았다.
6,25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부모님은 아버지의 군 징집을 피해 언니 오빠를 데리고 다시 외갓집 동네로 들어갔다.
쌍둥이 오빠가 태어났다.
매일 같은 시간에 미군이 와서 동네 여자들에게 겁탈을 시도했다.
동네 이장인 연순 아버지는 그들만 동네로 들어오면 오 천주님 하며 성호를 그었다. 어머니도 그럴 위기에 처하기도 했는데 용케 도망가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외갓집엔 기근을 피해 올라오던 사람들이 들렀던 대신 북한군이 가끔 들어와 식사를 하고 갔다.
북한군들은 동네 사람들 남녀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외갓집 공장에서 옹기를 받아다 행상을 시작했다.
넷째 오빠가 태어나면서 살림이 불기 시작했다. 오빠가 복이 많아서라고 복0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외할아버지는 벌거숭이던 동네 산에 소나무를 심어주셨다.
부모님은 논을 사고 밭을 샀다.
학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으나 중학교를 못 간 큰언니는 세월이 조금 더 좋아지면 서울에 있는 수도 여 중고에 보내주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집안 살림을 했다.
해를 거듭하며 학교 진학이 불가능해진 걸 알게 된 언니는 부모님이 동생들 낳아서 젖만 떼면 놓고 나가 힘들다며 동생들을 건사했고 살림을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친할아버지가 그 좋은 양반이 돌아가셨네 가셨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동네 사람들은 동네 어귀에 외할아버지의 선행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고 그곳을 비석거리라 불렀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른 지방에 살던 분이 와서 공장을 인수했다.
큰언니가 그 공장 사장의 아들과 결혼을 했다.
뙤약볕 아래 고추밭에서 동생들에게 고추 따라 시키고 나무 그늘에 누워 노래만 부르다 사라지곤 했던 큰오빠는 다른 일로 어머니에게 혼이 나고 서울로 도망을 갔다.
오빠 소식을 모르는 어머니는 건넌방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며 큰오빠 이름을 크게 여러 번 불렀고 크게 울었다.
어머니는 크게 울기도 했지만 노는 것도 힘차게 놀았다. 어디서나 대장이었다.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봄 여름 가을엔 밖에 나가서 아버지와 장사를 했고 겨울엔 집에 들어와 밀린 바느질도 하고 친구들과 놀기도 했다.
동네엔 어머니 또래가 가장 많았다. 대부분이 그랬듯 또래들도 외할아버지가 짝을 맺어줘 동네를 만들고 번성시킨 이들이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조금은 도도했다.
장구를 맨 앞에서 치며 뒤따르는 친구들과 마당을 돌았다. 그렇게 겨울을 나며 세 계절 동안 쌓인 신명을 풀고 봄이 되면 아버지와 함께 또 장사를 나갔다.
아버지는 옹기 리어카를 앞에서 끌고 어머니는 뒤에서 밀며 여러 동네를 돌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뒤에서 이리 가유! 하면 이리 가시고 저리 가유! 하면 저리로 끌고 가셨다.
주로 아침 일찍, 저녁 무렵에 동네 우물가로 가서 펼쳤다. 동네 아낙들이 모여들어 외상으로 들여놓은 항아리 값을 가을 추수가 끝나면 돌아다니며 거둬들였다.
외상 고객들 적어놓는 아버지 치부책엔 ‘칡골 마른 여자, 말 많은 여자, 봉당골 요강 작다고 한 여자’ 등으로 적혀있었다.
겨울엔 안방에서 두 오빠가 책상에 주판을 놓고 앉아 아버지가 부르는 외상값의 액수를 주판알로 계산해 합계를 말했다. 아버지는 치부책에 적으셨다.
두 오빠의 계산이 왜 그런지 똑같이 맞는 적이 없었다.
두 오빠는 서로 자기가 맞게 계산했다고 우겼다. 아버지는 한 번은 이 오빠가 부른 값을, 한 번은 저 오빠가 부른 값을 적으셨다.
부모님이 오랜만에 집에 오시면 우리 세 자매는 서로 아버지 옆에서 자겠다고 싸웠다. 어머니 옆에는 아무도 안 자려고 했다. 어머니 옆에서 자다가 어머니를 조금만 건드려도 잠기 밝고 예민한 어머니에게 찰싹! 종아리며 허벅지를 맞으니까.
부모님의 노고로 나는 쌀밥만 먹으며 자랐다.
추석 명절에 자식들을 풍성히 먹인 부모님은 또 장터로 떠나셨다.
또 한 달 후에나 집에 올 것이다.
친구와 숨바꼭질 하다가 뒤꼍 굴뚝 옆에 놓여있는 송편시루를 보았다.
한 켜 한 켜 솔잎을 얹어 쪄서 먹고 남은 송편이 시루 안에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안 계신 집에서 송편처럼 딱딱한 쓸쓸함을 느꼈다.
어머니는 일 년 장사를 끝내고 심신이 편해지는 겨울에 순해지셨다.
방 안 화로 위에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밥을 비벼 올려놓았고 우리는 누룽지가 살짝 눌은 뜨끈한 비빔밥을 먹었다.
이웃 분들과의 대화가 화로를 가운데 놓고 많이 있었다.
어느 겨울날엔 어렵게 사는 이웃 성옥 아버지가 놀러와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가 어머니에게 "아줌니, 이제 읍내에 걸어다니지 말구 버스 타구 다니셔유. 이제 뭐 얼마나 사신다구 돈을 아껴유." 했다.
성옥 아버지는 다음 해 가족을 데리고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갔다. 몇 년 후 그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그의 집 마당에서 갑자기 온천수가 솟아 놀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부모님은 그 사람 팔자에 돈은 없나보다고 했다. 온천수가 돈벼락인데.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은 옹기전을 앉아서 하는 도매상으로 바꾸며 장사 터를 서울 뚝섬으로 옮겼다.
어머니가 추수 후에 외상값을 받으러 이 동네 저 동네 수십 리 길을 걸어 다니다가 발이 자꾸 밖으로 꺾이기 시작하자 내린 결정이었다.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땐 항아리를 팔면 다 배달까지 해줘야 했다. 손님들이 차가 없던 시절이니까.
아버지는 뚝섬에서 항아리를 배에 싣고 강을 건너 배달하셨다. 지금의 강남지역이다.
부모님은 뚝섬 가게에서 장사하시며 큰오빠와 쌍둥이오빠가 넷째 오빠를 결혼시켰다. 나는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영어 참고서 값을 타러 가게에 갔다가 어머니에게 쫓겨났다.
우리 세 자매가 이것저것 사야 한다고 손을 내밀어 줘야하는 돈 액수가 늘어나자 파란 지폐를 세던 아버지가 돈을 위로 던져버려 지폐뭉치가 천막 천장을 치고 흩어져 내렸다.
아버지 연세 오십 세에 당뇨가 찾아왔다.
의사가 권한 당뇨식은 우유와 소고기, 계란이었다. 어머니는 수년 동안 매 끼 계란 후라이와 소고기 국을 아버지에게 끓여 드렸다. 아버지에게 술 마시지 말라고 어머니가 계속 말했다.
옹기장사 계모임에 갔던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오자 어머니는 또 싫은 소리를 했다. 잔소리가 지겨운 아버지가 가게 마당으로 나가 항아리 하나를 들어 던져 깼다. 어머니가 뒤쫓아 나가 더 큰 항아리 다섯 개를 더 세게 던져 박살을 냈다. 그 길로 아버지는 술을 끊었다.
넓은 터에 많이 쌓여있는 항아리는 늘 반짝반짝 윤이 났다. 굽어지지 않은 어머니의 가운데 손가락은 항아리를 매일 닦고 파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날씨가 바짝 추워지는 김장 대목엔 가게 마당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옹기를 닦았고 장사를 하셨다.
어머니는 자주 말했다. 장사 중에 항아리 장사가 최고라고. 썩지도 않아, 해가 지나면 가격이 털썩 올라, 부르는 게 값이여. 음식 장사가 뜨거운 불 앞에서 한 그릇 한 그릇 다 만들어서 내 놔야 돈이 되는 것에 비해 이건 흥정 후 손님이 들고 가면 끝이여.
어머니는 고향 외할아버지에게서 인수받은 사돈네 옹기 공장뿐 아니라 광주 곤지암 서산 등으로 물건을 하러 다녔다.
공장에 갈 땐 가게에서 늘 새벽에 떠났는데 초겨울에 허리 말기가 미처 마르지도 않은 치마를 입고 나가 떨기도 했다.
어머니는 전국 공장에서도 대장이었다. 운전기사에게 웃돈을 주고 제일 큰 트럭에 제일 좋은 물건만 가득 실어왔다. 공장에 온 상인들은 거의가 남자였다. 어머니는 남자들도 다 이겼다.
돈이 모자라는 공장 주인들이 어머니에게 와 사정하며 선불을 부탁하기도 했다.
장사가 잘 됐다.
김장 대목 땐 항아리가 모자라 담겨 있던 고추장을 비워내고 씻어 팔기도 했다.
금이 간 항아리는 아주까리 열매를 바깥과 안으로 눌러 붙여 막아 팔았다.
사가지고 간 항아리가 샌다고 도로 가지고 오는 손님들에겐 가게에선 안 새었다고 우겨 돌려보냈다. 어머니는 손님들도 다 이겼다.
내가 아파 가겟방에 누워있을 때 어머니가 뚝배기에 약병아리를 고아주셨다.
어머니는 큰 행주를 물에 담가 항아리를 닦았다. 손님이 없을 때 늘 닦았다. 어머니는 손이 젖었을 때 굽어지지 않는 중지를 자주 만졌다.
그곳에서 팔 년을 장사하고 가게를 친정집 가까운 쪽으로 옮겼다.
부모님은 집과 가게를 걸어서 출퇴근을 하셨다. 그곳에서 장사하실 때 막내오빠가 결혼을 했다.
몇 년 후 가게 터 주인이 그곳에 집을 짓게 돼 다른 시장 쪽으로 옮겨 아버지는 자전거로, 어머니는 걸어서 출퇴근하셨다.
그곳에서 장사하시며 작은 언니와 나, 동생을 결혼시켰다.
친정이 이웃 동네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부모님도 그 아파트 근처 시장 쪽으로 가게를 옮겼다.
결혼해서 같이 살던 오빠가 부모님을 승용차로 출퇴근시켜드리기 시작했다. 걸어가기도 먼 거리이기도 했지만 부모님도 나이가 드셨기 때문에.
같이 사는 오빠와 다툼도 일었다.
어느 날 밤 오빠는 너무 당당한 어머니가 버겁다며 어머니가 큰형 사육에 실패하자 자신을 사육했다며 소 울음을 울었다. 그러고 나서 베란다에 피어있던 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꽃도 때가 되면 지는데...’
다음 날 오빠는 여전히 부모님을 가게로 출근시켰고 저녁이면 집으로 모셔왔다.
부모님도 오빠도 따로 살기엔 이미 늦었다.
오빠가 성당 계단을 내려오는 늙은 어머니의 손을 잡아줄 때 어머니는 오빠의 손을 통해 오빠의 사랑이 사르르 어머니의 팔을 지나 가슴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고도 나에게 말했다.
오빠를 향한 어머니의 지독한 짝사랑과 따로 뭘 한다고 했지만 벌이가 시원찮은 오빠의 어머니를 향한 경제적 의지는 상호 보완관계로 고착화 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다달이 배달돼 안방 벽에 걸려있는 전깃세 수돗세 용지는 월말이연 지불한 영수증으로 아버지 서류장에 보관됐다. 각종 세금 용지는 아버지가 집게를 풀어 내려서 은행에 갖다 내셨다.
김장철이 지나 대목이 끝나면 해마다 부모님은 겨울동안 가족이 먹을 쌀과 연탄 비누등 생필품을 집으로 들이셨다.
어머니 가게 가까이에 살고 있던 나도 조금 멀리 살던 큰언니도 부모님을 뵈러 가게에 자주 다녔다. 닭백숙을 같이 해먹기도 하고 노래방도 같이 갔다.
어머니가 좋아해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최병걸의 ‘난 정말 몰랐었네’였다.
아버지 치매가 시작됐다.
가게에 계시던 아버지가 없어졌다. 어머니가 애태우는 중에 시장 입구 이발소 사장님이 아버지를 모시고 저녁에 가게로 들어왔다. 집을 못 찾고 밖에서 오가는 아버지를 발견해 모시고 왔다고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냅다 소리쳤다.
사람 애좀 그만 좀 태워유!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대답하셨다. “원 세상에.”
가겟방에서 언제나처럼 두 분이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쳐다보며 “댁은 누구슈?” 했다. 놀란 어머니가 소리 질렀다. “아이 참!”
아버지가 말했다. “그 말 좀 살살하면 안 돼?”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병 중에야 하셨다.
아버지가 당신 밥을 앞에 두고 손을 뻗어 어머니 밥을 떠서 드셨다. 어머니가 소리 질렀다. " 거기 거기 당신 밥 거기 있잖어유! 그 밥 먹어유! 내 밥 먹지 말구!“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 날까지 어머니는 출퇴근 시키는 오빠 차를 타고 아버지와 함께 가게로 출근했다.
아버지는 딱 하루 가게에 출근 못 했다. 그날 집에서 누워 점심까지 받아 드셨다. 그날 밤에 돌아가셨다. 아버지 연세 83세였다.
장례는 집에서 치르기로 했다.
빈소는 안방에 마련했다.
누우신 아버지 앞에 병풍을 쳤다.
장례 이틀째 날이다.
어머니가 성수를 영정 아래로 팍팍 뿌렸다. 아버지가 그 성수 좀 살살 뿌리면 안 돼? 말할 거 같았다.
어머니가 방을 나서며 말했다. “어이덜 곡덜 해여!”
곡이야 마음에서 눈물이 올라와야 하는 거지 명령으로 되는 것인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큰언니가 아이고 아이고 곡을 했다.
평소에 어머니에게 자주 당하던 작은 어머니가 쿡 하고 웃었다.
삼우제 때 아버지 산소에서 어머니가 우셨다.
싱가포르 제부가 뒤에서 가만히 어머니의 양 어깨를 잡아드렸다.
삼우제를 끝내고 모두 우리 집에 모였다.
평소 말은 없으셨지만, 당뇨 치매를 오래 앓았지만, 그랬던 아버지가 영원히 자리를 비우자 오빠들이 어머니에게 거침없이 공격했다.
한 오빠는 어머니에게 콕 콕 찌르는 그 말투 좀 고치라고 했다. 어머니는 싫다고 안 고친다고 오기의 말로 소리쳤다.
다른 오빠는 나도 엄마가 싫다고 말했다.
저녁이 되어 각자 집으로 가기 위해 모두 집을 나섰다. 저층 아파트 꼭대기 층에 있던 우리 집에서 계단을 난간을 짚고 내려가며 어머니가 혼잣말을 했다. ‘이것들을 그냥?’
온 힘을 뭉쳐서 말했지만 그 소리가 이젠 속절없고 껍질만 있는 느낌으로 들렸다. 삶은 슬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일상은 똑같이 흘렀다. 아버지만 안 계실 뿐.
어머니는 여전히 오빠 차로 출근했다.
옆 집 노인이 가게로 와서 아버지 없는 빈 방을 들여다보며 울었다. 어머니도 울었다.
얼마 후 장사하시며 아버지 병시중까지 들어 오래 힘들었던 어머니에게 그동안 아프지 못했던 몸이 휴식하라고 한꺼번에 아우성이었다. 심한 장염으로 여러 날 고생했고 집에서 영양주사를 맞느라 며칠 가게에 못 나갔다.
다시 가게에 나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 생전에 맛있는 것 좀 많이 사다드릴걸 그거 하나 후회된다고 했다. 뭐든지 해드리면 잘 드시니까 그 생각은 미처 못했다고 했다. 시장에 나가 관심있게 보니 맛있는 게 많더라고 했다.
어머니의 일상도 다시 회복해 갔다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어머니의 대장 자리는 계속 유지되었다.
어버이날에 꽃바구니를 크게 해 가지고 온 올케언니에게 이 비싼 꽃은 다 뭐 하는 거냐고 도로 가져가라고 화를 냈다.
다음날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올케언니가 꽃 대신 돈으로 가져왔으면 오죽 좋았겠느냐고, 서운한 일 많은 어버이날 좀 없었으면 좋겠다고.
어머니가 많이 늙었다.
늙어서도 가게에서 대장이었다
어머니는 막대기 하나를 들고 의자에 앉아서 장사하셨다.
손님들이 와서 항아리 크기를 말하며 찾으면 막대기를 들어 위를 가리키며 저거 저거 응 그거 직접 내려서 보라고 했다.
손님들은 자기들이 내려서 보고 맘에 들면 결정해서 사가지고 자기 차에 싣고 갔다.
내려서 보고 항아리가 어쩌네 맘에 안 드네 하면 어머니는 혼을 냈고 어머니에게 꾸중 들었다고 안 사가는 손님은 없었다.
오랜 대장님으로 계신 어머니를 출퇴근시키는 일이 계속되자 오빠는 힘들어했다.
어느 날 오빠가 가게로 모시러 오는 시간이 늦어지자 어머니는 오빠에게 전화해 왜 이리 늦느냐 재촉했다.
시간에 쫓겨 급히 달려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차에서 오빠는 이 짓이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며 치를 떨었다.
어머니에게 그 말을 전해 들으며 나는 어느 책에서 읽었던 문장을 떠올렸다. ‘보는 사람 없으면 갖다 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다’
어머니는 기가 죽어갔다.
세월에 장사 없으니 몸도 더 쇠약해져 갔다.
어머니는 살아온 삶에 여한은 없다고 하셨다. 다만 덕을 쌓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다.
우리 집에 가족들이 모인 날이 있었다.
어머니가 노래방에 가자고 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났다. 어머니는 당신이 걸어 계단을 내려가겠다 했고, 막내 오빠가 “효자는 부모가 만드는 거유” 하며 어머니에게 자기 등을 갖다 댔다. 어머니는 손사래를 쳤고 오빠는 어머니가 업혀야 나 효자 만드는 거라고 말하며 자꾸 등을 들이댔다. 어머니가 오빠 등에 업혔다.
어머니를 업은 오빠가 저층 아파트인 우리 집 오 층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노래방이 있는 6단지 상가까지는 3단지 우리 집에서 한참 걸어가야 했다.
단지 내 도로를 건너 더 걷다가 내 남편이 어머니를 받아 업었다.
6단지 상가 지하 계단을 내려가 노래방에 도착했다. 큰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어머니가 부를 노래 최병걸의 ‘난 정말 몰랐었네’를 눌렀다. 우리는 시작부터 같이 불렀다.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신명도 기운이 있어야 풀 텐데 어머니의 목소리도 쇠했다.
어머니는 가게를 접기로 결정했다.
어머니가 나에게 가게에 남아있는 항아리 한 리어카를 유산으로 주셨다. 나머지는 외사촌 언니들을 불러 나누어주셨다.
어머니의 옹기장사 60년이 막을 내렸다. 어머니 연세 80세였다.
어머니는 아파트 단지 내의 노인정에 나가기 시작했다. 거기서도 어머니는 기죽기 싫다고 당신 얼굴 좀 세워달라고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나는 막 마친 김장김치와 찬조금을 가지고 찾아갔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는 날이 많아졌다. 어머니와 자주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6.25 한국 전쟁 때 친정동네로 내려와서 옆 동네로 밥을 얻으러 다녔다는 이야기를 처음 하셨다. 부잣집 맏딸이어서 이웃동네에서도 어머니를 다 알기에 밤에 머리에 수건을 깊이 쓰고 다니며 밥을 얻었다고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원인이 대낮에 외할머니와 사랑을 나누는 현장을 외숙모에게 들켜서라고 했다.
두 분이 계신 걸 모르고 방문을 벌컥 연 외숙모에게 고스란히 들켰다고.
놀라서 수치심에 그 길로 병을 얻어 앓다가 돌아가셨다는 말은 그때 처음 들었다.
큰 외숙모 때문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작은 외삼촌이 평생 큰 외숙모를 미워했다는 말도.
이 년 뒤 어머니의 자리보존이 시작됐다. 장롱 이불속에 감춰둔 저금통장을 꺼내다가 넘어져 다친 사고였다.
아아악 악...온 몸 뼈의 통증으로 24시간 고생하다가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 후 집으로 요양원으로 집으로 ..
형제들이 요일 별로 당번을 정해 어머니 간병을 맡았다.
나는 아이들이 대학에 다니고 있어 일을 해야 할 때라 주말로 당번을 정해 어머니에게 다녔다.
얼마나 피곤하던지. 얼마나 졸리던지.
어머니가 늦은 밤에 라면 반 개만 끓여달라는 부탁을 듣고 알았다고 대답만 하고는 계속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던진 베개가 침대로 날아왔다. 나는 놀라 일어나서 라면 봉지를 뜯어 반개 잘라 끓여 상에 놔드리고 또 방으로 들어가 잤다.
큰언니가 당번일 땐 조금만 늦어도 어머니가 큰언니에게 전화해 화를 냈다. 어머니 성질 못지않은 큰언니는 어머니에게 도착해 바로 받아쳤다. "엄마는 왜 유독 나하테만 깔구작대요!" 늘 그렇게 살아오신 어머니는 언니가 왜 그렇게 대드는지 몰라 어이없어했다.
내 당번이던 어느 날 점심에 어머니와 동그란 밥상을 놓고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내가 물었다.
“엄마 담배 오랫동안 피웠잖아. 엄마도 외숙모처럼 입덧이 심해서 담배를 배운 거여?”
어머니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며 말했다.
“아니, 괜히 까부느라 그랬지뭐”
입 안에 있던 밥이 밖으로 뿜어 나올 뻔했다. 얼른 삼키다가 사래가 들어 캑캑거렸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첫사랑!”
요셉은 외할아버지가 병원 내주려고 생각했던 고장인 충주에서 의사로 있었다고, 딸만 여럿 낳았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오빠와 따로 살 걸, 후회의 말도 했다.
어머니 머리 맡엔 늘 돈 가방이 있었다. 돈가방이 어머니늘 지켜주었다.
한 부모가 여러 자식은 건사해도 여러 자식이 한 부모 건사 못한다는 옛 말이 맞는 것 같다.
나의 발목 골절로, 큰언니의 몸살로 당번 자리가 비어갔다. 다들 각자 살기 바빠 빈자리를 누가 더 채울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다시 요양원으로 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요양원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뒤였다.
어머니라는 꽃은 '저 꽃도 때가 되면 지는데...' 한숨 짓던 오빠 곁에서 십오 년을 더 피어있다가 말라가다가 오빠 곁에서 툭 떨어져 생을 마감했다.
입관 예절이 시작됐다.
장례사가 자식들에게 어머니 머리를 빗겨드리라고 했다. 가게를 비울 수 없어 어머니 누워계실 때 한 번도 못 와 본 작은 언니는 빗으로 어머니 머리를 한 번 얼른 빗겨드리고 “엄마 미안해!” 짧게 말했다. 언니는 빗을 얼른 내려놓고 얼른 뒤로 돌아 얼른 도망치듯 빠졌다.
어머니와 애증 관계로 있으며 어머니를 오랫동안 보지 않다가 어머니가 자리에 누워서야 다니게 된 올케언니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뒤에서 계속 부르며 울었다.
어머니와 올케언니 사이를 화해시켰던 큰언니가 올케언니를 돌아보며 한 마디 했다. “가는 사람 발길은 잡지 말아야 할 거 아녀!” 다시 앞을 보고 바로 섰다. 구남매 중 제일 키가 작은 큰언니가 그 순간 키가 제일 커보였다.
그래도 올케언니는 어머니를 계속 부르며 울었다.
결국 빗을 얼른 놓고 뒤로 빠졌던 작은언니가 “이리 나와!” 하며 올케언니 팔을 잡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장례사가 그제야 관 뚜껑을 덮었다.
나중에 만났을 때 올케언니가 말했다. 그렇게 울고 나니까 가슴 여기가 시원하더라고. 신기하더라고.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묻고 내려와 우리 가족은 막내오빠 공장에 모두 모였다. 조카들도 함께였다.
여자 어른들이 밥을 했고 반찬을 했고 찌개를 끓여 상을 차렸다. 과일도 깎았다. 떡과 술도 갖다 놓았다. 우리들은 어머니가 자식들을 많이 낳아주셔서 이렇게 우리가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어머니 고생 많으셨다고.
평생 부모님을 모신 넷째 오빠내외에게도 고생 많으셨다고 모두 감사인사를 했다.
큰 조카가 노래를 불렀다.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하나 둘 합류하며 합창이 되었다.
“가슴에 이 가슴에 심어둔 그 사랑이 이다지도 깊을 줄을 난 정말 몰랐었네
아아아아아.."
밭 한가운데 우뚝 선 공장 안에서 우리들의 노랫소리가 멀리 퍼져나갔다.
부모님을 오래 모셨던 넷째 오빠는 어머니 떠나시고 칠 년 후에 어머니를 따라가 어머니와 같은 묘원에 잠들었다.
발길을 돌리려고.. 선창했던 조카는 사 년 전에 암으로 제 외삼촌을 따라갔다.
효자는 부모가 만드는 거라며 어머니에게 등을 내밀었던, 우리 대가족 모두 모이라며 늘 공장을 모임 장소로 제공했던 막내오빠는 작년 가을에 간경화로 큰 조카를 따라 떠났다. 큰 조카와 같은 묘원에 잠들어 있다.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를 가만히 앉아 듣기만 하던, 시를 썼던 젊은 조카사위는 작년 연말에 심장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하고 제 처삼촌을 따라 떠났다.
https://youtu.be/BkVxJ2hhTGg?si=3fAZCHpPQd-lOHp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