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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by 개울건너


여덟 집이 한 지하농수를 같이 쓰는 이곳 텃밭은 여덟 개의 정 사각 모양으로 나뉘어 한 줄로 이어져있다.



성이 최 씨여서 여기선 최 사장으로 불리는 좌측 밭 남자는 공직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덩치도 목소리도 큰 그는 성격이 급해서 어려서부터 그의 부모나 형제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참견하면 하도 꽥꽥거려 집에서 왜가리로 불렸단다. 조카들에게선 ‘왜가리 삼촌’으로 불리고.

나이가 들어 횟수가 줄긴 했어도 그는 지금도 그의 아내에게 가끔 꽥꽥 소리를 지른다. 이젠 참지 않는 그의 아내에게 더 세게 되받아침을 당하면서도.


우측 밭 남자는 경찰서장으로 퇴직했고 성이 장 씨여서 이곳에서 그는 ‘장 서장’으로 불린다.

가끔 같이 모여 커피 마실 때 그는 경찰서에서 회의를 주도하는 자세가 나오기도 한다. 허리를 약간 굽히고 고개는 똑바로 하고 한쪽 팔꿈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 끝을 이리저리 흔들며 얘기할 때 그가 오만해 보이며 같이 앉아있는 이들이 그에게 지시받는 느낌이 들어 맘이 불편하다.




여덟 집이 모여 함께 의논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지난해에 비포장의 좁은 농로를 포장해 달라고 함께 면사무소에 서류를 넣었고, 그 일이 실행되려던 차에 민원이 발생한 것이다.


우리들과 도로 지분을 함께 하지 않은, 여덟 개의 밭 길이를 다 합친 것만큼의 밭을 혼자 소유 중인 맞은편 밭 주인이 배수로 문제로 민원을 넣었단다. 농로를 포장할 경우 빗물이 그쪽 밭으로 스며들 수 있음을 우려하는 내용으로.


우리 쪽 텃밭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로 퇴직한 첫 번째 밭 아낙 양연 씨가 단톡 방에 회의를 공지했다.

도로포장 시 우수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오늘 밭에 나오신 분들이 많은데 오전 열 시에 만나 이 문제를 의논하자고.


늘 그래왔듯 우리 밭에서 만나기로 했다.


밭에 나오지 않은 두 집은 오늘 결정한 의견에 동의한다는 답을 미리 주었다.




농막에 있던 긴 사각 탁자와 의자를 남편과 함께 밖으로 내놓았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귀여운 모습은 나이 성별과 상관이 없음을 처음 알게 됐다. 왜가리 최 사장의 귀여운 모습을 처음 보았으므로.

그가 엉거주춤 솥단지를 들고 초록을 가르며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잠시 빈 시간을 이용해 붉은 고추를 부지런히 따다가 일어나 어머 그게 뭐예요? 물었다.

그가 솥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어 보여주는데 여러 개의 삶은 계란이 들어있었다. 그는 바쁜 아내의 명령에 자기가 삶았다고 했다.



예쁜 모습도 나이 성별과 상관이 없다.

앞머리가 중간까지 벗겨졌고, 지시하는 것 같은 손짓이 체화된 장 서장도 예쁠 수 있음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가 스테인리스 그릇에 농사지은 포도를 씻어 담아 들고 초록을 가르며 들어왔다.

눈웃음과 함께 짓는 그의 미소에 나는 놀란 감정을 감추고 어머, 하며 웃었다.



야무진 총무 양연 씨가 뒤따라 들어왔다. 까만 봉지에서 자기가 농사지은 참외를 꺼내며 참외가 이래 못 생겼다며 웃었다.



성질 급한 최사장이 계란을 꺼내 껍질을 벗겼다. 자기가 삶은 계란이 잘 익었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계란이 익지 않아 흰자가 물컹거리고 그걸 손으로 가르자 노른자가 그대로 흘러내렸다. 10분을 끓였는데도 왜 이렇게 안 익었는지 모르겠다며 그가 당황했다.


눈치 빠른 양연 씨가 모임 약속 시간을 급히 잡아서 급히 삶으셨나 보다며 더 삶자고 했다.

나는 농막으로 들어가 이동식 전기 레인지를 가지고 나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계란 솥을 그 위에 올려 더 삶았다.


나는 그 순간 최 사장의 아내가 버릇처럼 보는 그의 흉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그가 뭘 좀 하면 그녀가 해야 할 뒤처리가 더 많아진다고.

그가 밥을 하겠다고 쌀을 씻으면 쌀이 주방 바닥 사방으로 튀고, 감자 농사는 잘 지어놓고도 캘 때 살살 요령으로 하지 않고 힘으로만 해 감자를 호미로 다 찍어놓고...


나는 배가 쿨렁이도 자꾸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힘이 들었다.



장 서장이 자기네 포도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렇게 잘 됐다며 자랑을 했다.


참외를 깠다.

썰어보니 참외 주인인 양연 씨의 속처럼 참외 속도 싱싱했다. 씨는 통통했다.



다른 쪽엔 문외한이지만 한 분야엔 전문가인 경우가 많다.

주방일이나 밭일엔 종종 사고를 치지만 사십 년 공직 생활에서 행정업무로 뼈가 굵은 최 사장이 큰 목소리와 빠른 말로 회의를 리드했다.



장서장이 한쪽 발꿈치를 탁자에 올리고 손을 펴서 흔드는 행동이 오늘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가 손으로 길과 앞밭을 이리저리 가리키며 최 사장의 말을 거들었다.


성질대로 크고 빠르게 설명하는 최 사장이, 손 끝을 흔들며 이리저리 가리키는 장 서장의 손짓이 오히려 의지가 되었다.


평생 손기술로 처자식 먹여 살린 남편은 면에서 묻어놓은 저쪽 길의 우수 관을 미리 보고 왔는데 거기 관은 크고 튼튼하게 묻어 놓았더라고 말했다.


최 사장이 엉망으로 거둬놓은 참깨의 검불과 상한 깨를 키질로 고르느라 조금 늦게 합류한 그의 아내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외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의자가 모자라 나는 옆에 따로 깔아놓은 낮은 평상에 앉아 깻잎을 다듬으며 그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 살금살금 사진을 찍었다.



최 사장과 장 서장이 남편에게 말했다. 저 쪽 길의 우수 관을 같이 보고 오자고.


우린 다 같이 일어나 밭을 나가서 그리로 갔다.


우수관이 묻힌 곳을 들여다보고 밭길 포장을 시작하는 지점이 어딘지 발을 옆으로 해 줄을 그으며 가늠해보기도 했다.




모두는 다시 우리 밭으로 돌아왔다.


최 사장의 아내는 민원을 넣은 앞밭 아낙을 원망하며 우리가 그 집 민원을 넣는다면 그 집은 크게 걸릴 게 있다고 간간이 날을 세웠고 최 사장은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간간이 만류했다.


양연 씨는 서로가 시끄럽게 해서 서로에게 좋은 경우는 못 보았으니 조용히 해결하는 쪽으로 의논하자고 했다.


면에서 해주는 도로에는 애초에 우수관을 묻지만 개인들이 놓은 도로엔 요청하는 포장만 해줄 뿐 우수관까지 묻어주진 않는다고 장 서장이 설명했다.




우리는 앞집 밭으로는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턱을 두고 도로의 물은 각자 밭으로 들어가서 잦아지도록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여기가 모래땅이어서 물 빠짐이 빨라 다행이라고 했다. 그리고 혹시 면사무소에 갈 일 있으면 담당 주무관에게 우리의 공동 도로 주소를 말하며 더 다른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물어보고 재촉도 하자고 결정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 일어섰다.





늦은 오후에 양연 씨가 오늘 회의에서 의견을 모은 내용을 단톡방에 올렸다.


우리가 내린 이 결정이 면사무소에 받아들여질 경우 9월 중 날이 선선해지면 추진할 예정이라고 하니까 여러 또 다른 의견 있으시면 말씀해 달라고, 갑자기 가진 만남이라 참여 못하신 분들께는 죄송하다고, 얼른 포장되기를 기원하다고 했다.


나는 깻잎을 다듬으며 살금살금 찍은 사진과 함께 답 글을 올렸다


<<전원일기가 따로 없죠. 10시 모임 시간이 되자 최 사장님이 직접 삶은 계란을 솥 채 들고 들어오시고, 이어서 장 서장님이 당신 밭에서 딴 포도를 씻어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 들고 들어오시고.

우린 모두 활짝 웃었지요.

양연 씨는 까만 비닐봉지에 뭘 넣어오셨나, 꺼내는데 직접 농사지은 노란 참외네요.

저는 커피를 끓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옆 평상에 앉아 깻잎을 다듬으며 회의에 참여했네요.

행정가로, 기술자로, 교단에서, 경찰 중역으로 활약하시던 분들이 머리를 맞대니 합리적인 의견이 도출되었습니다.

우리의 만남을 끝내고 돌아가며 양연 씨가 저에게 떨어트리고 간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사랑채 내주셔서 고마워요!”

텃밭 식구들이 떠나는 등 뒤에 대고 남편이 말했어요. “여기 분들이 모두 좋으셔서..”

좋은 분들이 추진하는 일이니 잘 되겠지요.

모두 애쓰시는데 특히 앞에서 애를 가장 많이 써주시는 양연 씨에게 이 면을 빌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회의에 참석 못한 영란 씨가 답 글을 올렸다.

<<‘전원일기’ 드라마 보는 것 같이 편안한 모임이었네요.

모두 머리를 모아 좋은 결론이 나온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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