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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방아처럼

by 개울건너

비가 내린다.

이 비가 그치면 가을이 달려오리라.


참깨를 들고 남편과 함께 기름 방앗간에 들어갔다.


이곳 방문이 올해가 다섯 해째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사장님은 살림집인 2층에서 아직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이대 째 운영하고 있는 이 방앗간의 울퉁불퉁한 바닥이 수십 년 동안 기름을 먹어서 반질반질했다. 바닥에서도 고소한 냄새가 날 것 같다.

남편이 여기 좀 보라고, 바닥이 오랫동안 기름을 먹어 윤이 난다고 의자에 앉아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느끼고 있던 중이어서 그의 옆 쪽마루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이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나는 참깨 봉지를 열며 말했다. 깨를 씻지 않고 가져왔다고.



그는 고무 대야에 깨를 쏟고 수돗물을 틀어 맨 손으로 물을 여러 번 갈아가며 씻고 나서 조리로 뜨며 말했다. 집에서 씻어서 말려 가지고 와서 볶아야 기름이 더 고소하고 양도 많이 나온다고, 여기서 이렇게 씻어 젖은 채로 볶으면 기름의 양도 적고 덜 고소하다고.


작게 얘기해도 들리는 상황에서도 그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전해에도 그랬듯 여전히 크게 말했다.


제주의 여인들이 조용한 장소에서도 목소리가 큰 이유는 제주의 센 바람 속에서 내던 큰 소리가 습관이 돼서라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도 늘 방아 돌아가는 소리 속에서 일하느라 목소리를 크게 하는 것이 습관이 돼서 그런가 보다.


나는 그동안은 집에서 씻어 말려 가지고 왔는데 작년엔 씻어 널자마자 비가 계속 내려 깨에서 싹이 도로 나올 뻔했다고, 말리는데 너무 애를 먹어 올해는 그냥 가져왔다고 하며 아쉬워했다.

그가 말했다. 전기장판 위에 펴놓으면 된다고. 아, 나는 무릎을 쳤다. 왜 그 쉬운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이제야 철이 들어가고 있다.


바구니에서 물이 대충 빠진 참깨가 뜨겁게 달궈진 솥 안으로 들어갔다. 깨가 김을 급히 올리며 뱅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깨가 자동 솥에서 볶아지는 동안 사장님은 누군가가 맡기고 간 깨로 짠 기름을 큰 페트병에 담았다.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저 기름 좀 봐, 와.. 어느 어머니의 자식 사랑일까.

누군지 모를 그 어머니의 노고가 그대로 전해졌다.


새댁 시절에 내 시어머니가 주셨던 기름이, 고춧가루가, 가을이 되면 자동으로 오는 줄 알았던 나는 이제야 깊은 한숨을 쉬고 있다.

“예전에 어머니도 저렇게 담아 우리한테 보내주셨잖아.”


봄부터 우리가 했듯 그 과정을 먼저 거치신 어머니의 노고 속으로 그제 서야 들어갔다. 결혼해서 내가 그들과 한 가족이 되었을 때 칠순인 시어머니의 허리는 이미 기역자로 굽어 있었다.



참깨씨앗은 싹틔우기가 유난히 까다롭다. 해마다 서너 번은 다시 심어야 성공을 한다.


삼사십 년 전 어머니는 참깨 싹 틔우기를 몇 번 만에 성공을 하셨을까. 어머니가 심었던 그때의 참깨씨앗도 우리가 심었을 때처럼 싹을 땅 밖으로 더디 내보내서 어머니의 애를 태우게 했을까.



2층에서 내려온 개가 툭 튀어나왔다. 나는 조금 놀랐다. 사장님의 아내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나에게 인사를 꽤 상냥하게 했다.

그녀는 올해도 날씬하고 예쁘다.

그녀가 사장님에게 얘 오줌 누이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개를 다시 2층 살림집으로 데려다주고 내려온 그녀는 해마다 그래왔듯 우리 앞을 지나 안쪽에 같은 그 자리에서 쪼그려 앉아 기름을 병에 담았다.


나는 작년 재작년 또 그전 해에 했던 생각처럼 강이 내려다보이는 2층에서 글을 쓰다가 저 여인처럼 기름 담아줄 시간을 어림잡아 내려와 저렇게 기름을 담아주고 싶다고 또 생각했다.


서로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고 각자 가슴 치며 한숨 쉬던 시기도 이미 오래 지나있기에 지금 우리가 방앗간을 운영한다면 이들 부부처럼, 자동으로 돌아가는 깨 방아처럼, 우리의 관계도 다툼 없이 이젠 수월히 돌아갈 것이다.

한 말 조금 넘은 양의 참깨에서 아홉 병의 기름이 나왔다.





남편은 봄마다 저 먼 산 여기저기에 안개처럼 피어있는 산 벚꽃을 바라보며 말한다. 내가 앞으로 저 꽃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 런지.

나는 생각했다. 저기에 저렇게 앉아 저 아낙이 병에 기름을 담고 저 반쪽짜리 신문지로 기름병을 돌돌 싸는 모습을 여러 해 더 보고 싶다고.




우리는 방앗간을 나와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나는 우리가 앞으로 몇 해나 더 이렇게 막 짜낸 기름을 들고 주차장을 향해 걸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남편의 뒤 허리에 내 한 손을 갖다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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