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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변 Dec 17. 2024

아들에게 무릎 꿇은 짜릿한 기분

체스로 배우는 초등학생 성장 실험(마지막 이야기)

노력하지 않는 어른 VS 노력하는 초등학생


심리전 밖에 할 줄 모르는 단순한 아빠와 선제공격을 못하는 소심한 초등학생. 아이에게 실패와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아빠는 몇 주 째 체스 공성전을 치르고 있다.


아들에게 봐주지 않는 유치한 어른!(져주지 않는 이유는 "자녀에게 실패감을 선물하는 못된 아빠" 편 참고) 몇 달간 길고 긴 체스를 두었다. 아들은 첫 승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지독하게 이겨 먹는 잔인한 아빠는 아들의 노력에 감동했다. 왕자님의 1승을 위해 큰 공약을 걸었다. 1판을 이기면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했다.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선물 공약은 아들의 가슴을 고출력 엔진으로 바꿔놓았다. 체스 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 수준으로 노력했다. 매일 고시생과 전투를 치러야 했다. 


금세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20전 전패 수준의 처참한 스코어에서 아들이 첫승을 거두더니 내리 2연승을 한다. 드디어 졌다. 밀고 들어오는 공격력이 상당하다. 상대의 수를 2,3수 앞서 계산한다. 정말 틈이 안 보인다. 끝까지 체스판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로 체스판이 절단 날 것 같다.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로 오렌지색 불꽃이 터졌다


6개월 정도 체스를 두니 아이의 실력이 상당해졌다. 7:3 수준으로 밀린다. 딴생각하면 그냥 진다. 아빠가 아들에 비해 가진 유일한 장점은 침착함과 심리전, 다른 모든 것은 자식이 낫다.



초등학생이 아빠를 무릎 꿇게 한 비결


투지 넘치는 아들은 패배를 매일 분석했다. 그동안 여러 권의 체스 책을 놓고 공부했으며 기보노트(체스 기록노트)에 필기를 했다. 노트를 훔쳐보니 그곳에 본인의 패배 여정을 자세히 기록했다. 어떤 수가 좋은 선택이었고 어떤 수가 게임을 끝내버린 악수였는지 모두 적혀있었다.


기보노트는 오답노트를 뛰어넘은 비법노트였다.


왕자님의 체스 비법노트(기보노트는 중전마마가 버렸다)



 맛집의 레시피가 이런 과정을 거쳤을까? 뛰어난 사업가들이 이렇게 실패를 복기하지 않았을까? 사실 어른들도 자신의 실패를 복기하지 않는다. "운이 없었다"라고 회피해야 정신 승리를 통해 초라한 1승 얻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초등학생이 뼈를 깎는 자기 인정과 훈련을 통해 어른에게 승리를 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


수많은 기만을 당했지만, 비법노트를 통해 고수가 된 아들도 이제는 잘 안다. 상대가 아무 전략도 없는 깡통이라는 것을.... 


가장 큰 단점이었던 소심함이 줄었다. 기물(아이템)을 잃어버릴까 봐 극단적 수비전술을 펼치다 매번 졌는데 그런 부분도 사라졌다. 신중하지 못하고 덤벙대던 부분까지 개선됐다. 체스는 만병통치약인가?


사실 녀석이 재미없다고 중도 포기할까 봐 걱정도 했다. 우쭈쭈 해주면서 용기를 주기도 했고 맛있는 것을 사주기도 했다. 패배의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찍은 후 재도전을 받아주기도 했다. 찍은 사진을 복기할 때도 실수의 순간을 복습시켰다. 


자신의 부족함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보물보다 귀한 선물을 얻었다.

그것은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훈련하는 겸손함.


기를 꺾어도 안되지만,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노력하는 태도는 어디서든 사랑받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자녀교육관을 가진 아빠. 져주지 않는 부모는 자녀에게 '노력 이후 승리'라는 기쁨을 안겼다. 부모로서 흐뭇하고 행복했다. 그날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아들에게 속삭였다.


아빠가 져주지 않아서 야속했지?
매일 졌는데도 포기하지 않은 네가 자랑스럽다.
노력으로 아빠를 이겨버리니 정말 기쁘다.


+형이 하는 걸 모두 따라 하고 싶은 둘째. 이 녀석도 체스를 두자고 한다. 점점 늘어나는 체스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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