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눈에 보이는 순간
앨리스의 말이 맞다. 사랑은 형체가 없어서 믿기 힘들다. 하지만 난 얼핏 본 것도 같다.
지금껏 에세이를 통해 부모님께 내가 무엇을 해드릴 수 있었는지, 실제로 어떤 것을 시도해 봤는지 나열했다. 마지막 글은 반대로 엄마, 아빠가 내게 준 것들을 회상해보려 한다.
젊은 날 엄마가 그랬듯, 스무 살의 나는 경제적 독립을 시도했다. 너무 무거운 등록금은 제하더라도 용돈 정도는 내가 벌고 싶었다. 숨만 쉬어도 나간다는 교통, 통신, 의류비 등. 작지만 단단한 결심을 지키기 위해 알바를 쉬지 않았다. 첫 알바는 치킨집 주방보조였다. 경력이 없는 초짜 알바생을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홀서빙은 어림도 없었고, 배달 전문 치킨집의 작은 주방에서 시작했다. 알바를 다녀오면 치킨이 된 것마냥 몸에서 튀김 냄새가 가득했다. 아빠가 항상 차로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눈치를 보며 버스 한구석에 서서 퇴근했을 것이다.
아빠가 가장 반가웠던 날은 단연코 배달의 민족 이벤트가 진행됐던 겨울밤이었다. 작은 규모의 프랜차이즈여서 평소엔 그리 바쁘지 않았던 가게에 불이 났다. 엄청난 할인가만큼이나 주문이 폭주했다. “배달의 민족, 주문!”이라는 주문 알림음이 2초에 한 번 울려 퍼졌다. 각종 양념을 묻히고, 무와 소금을 챙겨 포장하고, 배달 가는 치킨에게 배웅하느라 작은 주방을 오백 번은 돌았다. 순살치킨처럼 발려진 채 가게 문을 나서자, 눈이 포근하게 내리고 있었다. 기존 퇴근시간에서 한참이 지난 탓에 가로등 근처만 환했다. 유일한 빛 아래 아빠가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석방된 죄수처럼 팔랑팔랑 달려가며 외쳤다. “아빠~ 도망쳐~ 치킨이 쫓아온다~”
데리러 갈게,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다. 치킨집을 거쳐 편의점, 고깃집, 호프집을 퇴근할 때마다 느꼈다.
스물넷의 가장 큰 이슈는 CC였던 친구와의 이별이었다. 최장 기간 연애는 아니었지만 가장 오랜 후유증을 남겼다. 손잡고 다녔던 학교 구석구석을 혼자 지나칠 때마다 후회와 그리움이 짙어졌다. 시간을 꽤 잡아먹는 통학 대신 기숙사에 입주한 후였지만, 학교에 오래 있기가 힘들었다. 마침 휴일이 많았던 10월, 기숙사 대신 본가로 하교했다. 학교에서 먹고 자지 않는 것 이상으로 효과 있었다. 부모님 덕이었다.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했던 남자친구의 빈자리를 채워주셨다. 매일 저녁 메뉴를 상의하고, 슬픈 영화를 보며 서로 휴지를 건넸다. 주말엔 제철음식을 핑계로 바닷가로 데려가 주셨다. 그렇게 일상을 함께하다가 문득 우울에 잠기는 날이면 술친구가 되어 주셨다. 이미 들었던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또 들어주고, 무조건적인 내 편이라 당부했다. 그런 부모님 앞에서 마음 놓고 찌질하고 절절할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 말했던 타인들 중 유일하게 떠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믿음이 공고해졌다.
내가 사랑을 본 순간들이다. 눈 쌓인 어깨에서, 눈물 훔칠 휴지를 건네는 손에서, 언제나 내 편이라 말하는 입술에서 사랑이 보였다.
글로 써왔듯, 나 역시 사랑의 형체를 다듬는데 손길을 더했다. 그러니 확신할 수 있다. 고장군과 나, 나와 조물주 사이에 사랑이 있다고.
-연애 시절, 자차를 몰았던 베스트 드라이버 고장군의 실력이 많이 줄었다. 그 사이 조수석의 조물주가 우리 집 베스트 드라이버로 치고 올라왔다. 그런 둘에게 운전 연수를 받아보고 싶었다. 아마 극과 극의 수업 시간일 것이다. 며칠 전 도로 주행에 불합격한 탓에 에세이에 포함되지 못해 아쉽다.
-가족 구성원이 넷으로 확정된 이후, 다 함께 해외여행을 가본 적 없다. 여권이 만료된 지 한참인 엄마의 바람은 거창하지 않다. 동남아 가족 여행.
아빠가 첫 직장에서 20년 근속을 다 채우지 못했을 때 가장 아쉬워했던 이유기도 했다. “2,3년만 더 다니면 회사에서 동남아 여행 보내준댔는데..!”
조물주 대신 내가 티켓을 끊어 드리고 싶다. 딸내미 손맛은 까맣게 잊을 정도로 시원한 타이 마사지를 받게 해 드리고, 망고만큼 달콤한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
여행을 직접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은 대확효가 되지 않을까 싶다.
+<불속성 효녀 탈출 N계명>을 잇는 <불속성 효녀 여행 N계명>을 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