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유일한 술친구
여러모로 난 엄마를 닮은 편이다. 기본적인 성향, 드라마 대사 한 마디에도 터지는 눈물, 확고한 경제관념까지. 얼굴은 딴판인 우리지만 하는 행동이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술이다. 엄마는 맥주 한 잔에 어지러워지고 다음 날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에 비해 나는 알코올이 들어가면 우울감이 휘발되고, 술자리도 즐기는 편이다. 단순히 즐거우려고 마셨던 술 입문기를 지나 마시는 이유도 다양해졌다. 가끔 달라붙는 슬픔을 쫓으려고, 오래 보지 못했던 동창을 만나는 핑계로, 처음 마셔보는 주종의 오묘한 맛이 새로워서.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젓는 엄마는 종종 말하곤 한다.
술 마시는 거 보니까 딱 느네 아빠 딸이다
그럼 나는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엄마는 꼭 마음에 안들 때만 ‘느네 아빠’래. 아빠랑 싸운 다음 날은 ‘느네 아빠’ 밥 먹으러 오래고, 우리가 술 마시면 ’느네 아빠‘랑 ’느네 아빠 딸‘이라더라. ’내 남편‘, ’내 딸‘로 불러주십쇼!“
말은 이렇게 해도 24년 동안 항상 그랬듯 엄마 말은 틀린 적 없다. 술에 관해서 난 아빠를 닮았다. 술이 들어가면 똘똘 뭉치는 부녀는 우리 가족 내의 유일한 술친구들이다. 친구들과 밖에서만 마시는 동생은 우리 사이에 낄 수 없다.
아빠는 내가 술을 즐기는 걸 은근히 좋아했다. 대학교 1학년, 첫 자취를 했을 당시 아빠가 내게 준 선물은 두고두고 회자되곤 한다. 막 성인이 되어 술을 시작한 내게 소주의 맛은 쉽사리 적응되지 않았다. 작은 잔을 털어 마실 때마다 손소독제를 한 펌프씩 짜 넣는 기분이었다. 막상 알딸딸해지면 처음 만난 대학 사람들과 순식간에 친해지는 마법이 일어났기 때문에 안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찾아낸 최소한의 조치가 소주에 무언갈 섞어 마시는 거였다. 바텐더처럼 이것저것을 조합해 본 결과, 최고는 오렌지 주스였다. 살짝 섞으면 소주의 찌릿한 첫맛이 느껴지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해장 방법도 마찬가지였다. 연금술사처럼 내 몸에 이것저것을 들이부어 본 결과, 포카리가 제일 효과적이었다. 이걸 들은 아빠는 매달 자취방에 오렌지 주스 한 박스와 포카리 한 박스를 선물해 주고 갔다. 함께 온 엄마가 만들어온 반찬을 정리하며 혀를 끌끌 찼다. 애 술 마시는 걸 말리지는 않고 부추기는 것이냐며. 아빠는 껄껄 웃으며 이야기했다. 어차피 말려서 들을 나이가 아니니 쓴 맛이나 덜어주고 해장이나 시켜주자고. 아르바이트한 돈으로는 맛있는 밥이나 사 먹으라고 덧붙였다.
이제 아빠는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우리 둘의 술자리를 만든다. 맛있는 음식이 식탁에 올라오면 우린 은근슬쩍 쓱, 눈을 맞추고 한 잔을 곁들인다. 나는 아빠의 살아온 이야기를 대부분 술자리에서 들었다. 멋쩍어서, 굳이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미안해서 하지 못했던 여러 이야기. 나도 사춘기 시절 맨 정신, 아니 약간은 삐뚤어진 마음으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건넸다. 잔을 부딪히며 털어낸 이야기가 꽤 많다는 것을 엄마는 아마 모를 것이다.
아빠와 단 둘이 데이트하면 마무리는 술 한 잔으로 한다. 동네에는 아빠와 내가 사랑하는 안주집이 꽤 많이 생겼다. 골목마다 둘이 마셨던 어렴풋한 술 냄새가 나고, 종알종알 나누었던 이야기가 들린다.
-도보로 갈 수 있는 집 근처 음식점들을 같이 가보자. 동네에 더 정이 간다.
-부모님이 애주가라면 새로운 주종을 함께 도전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