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지막으로 누리는 연휴의 호사

일하는 중간의 휴식과 일이 없어 쉬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by 여문 글지기

100세 시대라는 현재를 살면서, 환갑 조금 넘겼다고 ‘마지막’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한참 이르다. 그래도 ‘오늘이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며 아닌척해도 마지막인 것은 분명히 있다.

작년에 계약직 일자리를 마치면서, 조직에서 정기 급여를 받는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운이 좋아서인지 올해까지 연장되었지만 역시 내년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올해는 추석 연휴가 대체휴일까지 포함하여 5일에다 한글날까지 있어서 더 길어졌다. 내친김에 10일에 연차를 신청하였다. 이렇게 내 직장생활 중의 전무후무한 10일의 연휴를 확보했다. 딱히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앞으로 이런 기회는 2044년에야 온다고 하는데, 그때의 연휴는 나에게 해당이 안 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일하는 중에 열흘의 휴식을 선택하였다.

사실 나는 휴일을 잘 즐기지 못한다. 오랜 기간 위수지역의 통제 속에 살았고, 휴일에도 대기 태세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스스로 묶여 살았다. 그래서 막상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도 긴가민가하면서 실감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 오래전부터 휴가를 계획한다는 일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관성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고, 몇 번의 계약직 일자리에서도 퇴직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생긴 휴식기도 나에게는 쉬는 기간이 아니었다. 늘 조바심 내면서 다음 일자리를 찾기 위한 시간이었을 뿐이다. 남들은 가족과 해외여행도 가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융통성 없는 남편을 가진 아내는 또 무슨 속박인가.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인도의 코끼리를 길들이는 글을 보았었다. 어린 코끼리는 힘이 없어서 가느다란 줄에 묶여 있어도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또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사람들이 채찍을 휘두르기 때문에 노력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성년이 된 코끼리는 가는 줄을 끊을 힘이 있고, 사람의 감시하는 눈이 없어도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한다.

내가 그 꼴이다.

연차 신청은 조금은 달라져 보고 싶어서였다. 지금의 일자리에서 나는 말단 직원일 뿐이고,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 나는 리더도 아니고 관리자도 아니며, 일의 성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지도 않다. 알면서도 그동안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 속박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있지도 않은 짐을 내려놓고 나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싶었다.

고향에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시지만, 명절이면 보통 고향으로 가는 ‘민족의 대이동’에 합류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나는 가지 않는다. 핑계는 많다. 천 리 길의 교통지옥을 뚫고 가기에는 나도 젊지 않고, 부모님들이 고향 찾는 자식을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뵙는 마음이 편안치 않다. 아내의 건강이 모처럼의 며느리 노릇에 부족한 이유도 있다.

긴 연휴의 시간은 다독(多讀)과 다상량(多商量)의 시간으로 삼아보고자 한다. 아직 다작(多作)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책을 읽으며 생각의 깊이라도 더해 볼 요량이다.

일하는 중에 맞는 나의 마지막 긴 연휴가 끝난 후에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을 것이다. 단지 마음의 짐을 조금 가볍게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