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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문 글지기 Aug 12. 2023

아날로그 감성, 일기 쓰기

글쓰기와 하루를 돌아보기

작년 초는 잠깐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있던 시기다. 아들로부터 모 커피 전문점의 수첩을 선물로 받았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연말이 되면 당연히 받던 수첩에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수첩이 생기니 실직자의 허전한 손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직장이 없다는 것은 이런 것에서도 차이가 생기는구나 하고 느꼈다. 직장에서는 새해가 되면 크고 작은 회의에서 새 수첩을 펴고 무엇인가 적었었다. 실직자는 여기에 무엇을 적을 것인가를 잠시 생각하였다. 수첩은 1년간 날짜가 미리 적혀 있었다. 그래서 수 십 년간 잊고 지냈던 일기를 여기에 쓰기로 하였다.


컴퓨터가 있고, 파일로 정리하면 나중에 활용하기도 훨씬 편하다는 것을 알지만 수첩에 적어보기로 했다. 필기구는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활용하기로 했다. 글씨를 쓰는 일도 많지 않아서 방치하던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고 하루에 한 면의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만년필로 글씨를 쓰면서 그동안 필체가 얼마나 흐트러졌는지도 알게 되었다. 잘 써지는 성능 좋은 필기구들을 사용하여 바쁘게 흘려 쓰기를 오래 한 결과이다. 몇 줄 되지 않는 일기지만 만년필을 이용하게 되니 글씨체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 수첩에 만년필로 적는 것시대에 한참 뒤진 아날로그 감성이지만 만족감은 상당히 크다.


그날의 일기를 그날 쓰지 못하고 다음 날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작년 한 해의 일기장을 모두 채웠다. 펼쳐보면 끝까지 채우지 못한 날이 더 많다. 누군가는 일 년을 되돌아보며 정리하는 글을 써 보라고 하였는데, 아직 그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금년에도 계속하기로 마음먹고 수첩 한 권을 골라서 일기장으로 쓰고 있다. 역시 많은 내용을 채우지는 않지만, 매일 쓴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수첩이 제법 두툼한데, 지질이 달라서인지 벌써 한 권이 끝나고 둘째 권을 시작하였다. 마무리된 일기장을 보면서 작심삼일에 기치지 않고 이어온 것에 대해 스스로 뿌듯해진다.


생각의 수단은 언어이다. 자기 수련이 되어 있는 경우에는 다른 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보통의 경우에는 글로 적어보는 것이 생각을 정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나는 글로 쓰면서 정리하는 수준이다.


걱정되는 일이 머릿속에만 있을 때는 한없이 커지기도 하고, 엉뚱한 곳으로 전이되기도 하지만 글로 적으면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이상 커지지 않고, 해결할 실마리가 보이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적어도 다른 일을 하는데 더 이상 방해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왜 일기를 쓰고 있는가? 한 가지 이유는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은 적어두고 나서 필요할 때까지 묻어두기 위해서이다. 일기장에 여러 가지를 적었지만 다시 펴보면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쓸모없이 과거에 매어있지 않고 현재를 단순하게 하는데 일기장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만약 안고 있던 걱정들을 글로 적지 않았더라면, 비록 그 걱정거리가 지금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묵직한 짐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글로 쓰고 실체를 눈으로 보고 나면, 이제는 잠시 멀어져도 좋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일기를 쓰면서 생긴 습관 중의 하나는 메모하는 습관이다. 보이는 종이에 갑작스러운 아이디어를 적어보기도 하고, 뉴스나 강의를 듣다가 남기고 싶은 말이 들리면 일단 적는다. 이런 메모지가 모여서 작은 글이 되기도 하고, 글을 쓰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


어느 연구보고에서 평소 대화를 자주 나누더라도 사용하는 단어는 겨우 수 백 개의 단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독서를 하면 무의식 중에 사용하는 단어가 늘어난다. 책에서 보았던 단어나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글쓰기를 하면 새로운 단어나 어휘의 사용이 더욱 늘어난다. 때로는 어릴 때나 다른 상황에서 자주 사용하다가 지금은 거의 쓰지 않던 단어가 갑자기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부지불식간에 일상 대화의 질을 높여주는 수단이 된다.


수첩에 적는 몇 줄의 일기로 갑작스러운 큰 발전의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단지 하루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적당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은 언젠가 다른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는 정도이다.


디지털 시대라고 하지만, 아날로그가 익숙한 세대가 무작정 옛것을 모두 버리고 새것만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나이기 위한 작은 버팀목 하나쯤은 남겨두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만년필로 적는 일기장’으로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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